생각 많고 망상 가득한 인생에 관하여
생각 많은 인생은 참 피곤한 것 같아요. 괜한 후회와 불안만 자꾸 불러오니까요. 특히 연말이면 미칩니다. 네, 접니다. 그 미친놈. 쿨한 남자이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아요. 가끔은 제가 봐도 너무 찌질하고 한심해서 스스로 절레절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생각 많고 소심한 작가들만 골라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나쁜 것만 골라 배우고, 큰 변함없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정말 슬픈 일 같아요.
나새끼, 변할 수 있을까?
지난달엔 이사를 했습니다. 책 옮기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몸살까지 났습니다. 가지가지하죠? 곁에 두고 읽는 건 정해져 있는데, 뭐 이렇게 잔뜩 쌓아두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플리마켓에다 몇 번이나 내다 팔고, 인천 본가 베란다에도 한 트럭을 쌓아뒀는데, 대체 뭘 이렇게 사댄 걸까요. 환금된 것도 아니고, 아까워 죽겠군요.
대학에 입학한 2009년 그리고 군 생활 하던 2010년부터 2012년 사이, 그즈음엔 도서정가제의 영향을 받기 전이라 그런지 인문학 책을 아주 싸게 사는 맛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무턱대고 사들인 책이 절반 이상인 것 같아요. 아무튼 오랜만에 책장을 정리하면서, 이번에 중간 라인 하나를 비워 피츠제럴드 컬렉션으로 깔을 맞췄습니다. 정말 쌈뽕하더군요. 번역가만 다른 개츠비가 대체 몇 권이던지, 저도 놀랐습니다.
Anyway, 피츠제럴드의 명품 에세이 <The Crack-Up>(1936)을 아시나요? 사실 블로그 포스트의 인용으로 그간 엄청 많이 소개했었는데요, 아무튼 어제 침대 위에 드러누워 그걸 술술 읽기 시작하는데, 잠이 솔솔 오더군요. 그의 문장은 언제나 빡세고, 직독직해는 힘에 부칩니다.
어쨌거나 이 에세이는 몰락한 스타 작가의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붕괴에 관한 진실한 내면 고백문인데요, 모든 삶은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이고, 진짜 파괴는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오며, 심지어 완전한 회복과 치유는 없고, 그저 우리는 금이 가고 깨진 채로 살아나갈 수밖엔 없다는 처연한 슬픔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그리고 작품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지칠 대로 지쳐버린 피츠제럴드. 그는 하루에 스무 시간씩 자거나 졸고, 그 사이에 결연히 생각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그리고 '생각'을 죽이기 위해 무의미한 '목록'을 만들고 찢기를 반복하죠. 미식축구 선수들, 대중가요들, 투수들, 행복했던 때들, 취미들, 살아본 집들, 군 제대 후 구매한 정장과 신발들 그리고 좋아했던 여인들까지. 그것들은 현재의 초라한 자신의 환경이 아닌 과거의 화려했던 순간에 가까운 기억이었을 겁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회복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곧바로 오래된 접시처럼 금이 가죠.
작은 안도감마저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마음 상태. 에세이의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한때 자신을 지탱하던 방향감과 독립에 대한 자부심이 흐려진 자리에서 그는 완전히 무너지고, 완벽히 소진된 나와 마주하다가 반짝 회복처럼 보이는 가짜 감정에 속아 진짜 절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걸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갑자기 피츠제럴드의 에세이를 소개한 건, 2026년엔, 새해에 할 일 목록. 이런 거 좀 집어치우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려고 한다는 개인적인 다짐을 한번 나눠보고 싶어서입니다. 내가 채우지 못할 것들을 잔뜩 나열하고, 매번 반복되는 실패를 인정해야만 하는 일. 거듭하는 상실의 반복이 이젠 너무 싫어요. 차라리 꼭 해야 할 일을 저는 그냥 모르고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다가오는 새해엔 머릿속을 비워 복잡한 생각을 좀 많이 덜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자는 것. 그거 딱 하나면 될 것 같아요. 하필이면 제일 어려운 목표를 하나 골라 세우는 제 인생이 참 전설이군요.
후덜덜! 2025년 12월 31일입니다.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상태, 마침내 이루고 싶던 관계. 내 마음 같지 않게 쫓을수록 멀리멀리 도망가는 그것들이 유난히 쿡쿡 가슴 한편을 찌르던 한 해였어요. 하지만 여느 해와 다름없이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좋은 사람들이 항상 곁에 있어줘서, 무엇보다 고작 시팔 소리 몇 번이면 툴툴 털어낼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 전부였던 제 일상의 무탈함이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했던 한 해였습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나는 09학번 프레시맨, 그 형은 05학번 복학생. 누디에 픽시, 가죽 재킷에 오토바이. 학교 공부는 뒷전인 쇼핑몰 운영자. 심지어 군대까지 다녀온 예비군 스웨거. 리얼 개간지 존잘남.
그 형을 닮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더니, 어느 날, 신입생들이 잔뜩 모인 술자리에선가 나를 샤라웃 해줬다. 졸라 행복했다. 직접 되어볼 생각은 안 하고, 멀리서 덕질하는 인생. 럭키 성덕 라이프. 하, 이때 끊었어야 하는데.
입대 전 마지막 학기, 우연히 영어 교양 수업을 같이 듣게 됐는데, 쉬는 시간마다 밖에 나가 담배를 태우는 그 형 옆에 앉아 무슨 말이든 듣고 싶고 참견하고 싶어 애를 썼다. 수업 전날이면 문자로 과제를 알려줬다. 그땐 카톡도 없었다. 롤리팝 광고 보며 햅틱 쓰던 시절, 하여간 애썼다.
수업이 있던 건물은 학교 후문, 충무로역과 맞닿아 있었다. 우린 그곳에서 자주 한잔 했고, 나는 그 형으로부터 남자의 예의와 멋을 배웠다. 나도 저렇게 돼야지. 제대하고 저런 복학생이 돼야지. 저렇게 예쁜 여자친구도 만들어야지.
과거의 그 형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모든 사소한 말과 움직임을 기억해 내어 반복하는 행위의 연속. 그렇게 흉내 내다보니 나를 따르는 후배들도 몇 생겼(었)다. 그들도 다만 나를 떠올릴 때, 한 번쯤 닮고 싶고, 한 번쯤 따라 하고 싶던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해 주기를.
내가 그랬다고 남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 망상가의 연말 착각. 고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으니, 다가오는 새해엔 망상이 미친 척 현실이 되었으면.
여러분,
올해 수고 많으셨어요!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ㅜㅜ
■ 연말이면 생각나는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