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우연히(반드시) 빛을 볼 거야.”
독일의 사진작가 볼프강 틸만스의 프랭크 오션 촬영 작업은 2015년 초, 패션 매거진 <Fantastic Man>의 10주년 기념 표지 촬영을 위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당초 프랭크 오션의 잦은 일정 변경으로 인해 무산될 뻔했던 이 촬영은, 초록 머리를 한 흑인 청년이 밤새 차를 몰고 런던으로부터 베를린에 위치한 틸만스의 스튜디오에 나타나는 열의를 보이면서 극적으로 성사됐다.
WT: 변덕스러운 초록 머리 놈, 이젠 포기야.
WT: (뾰로통) 내일 베를린으로 넘어갈 거야.
FO: 이번엔 진짜 갈게요. 우리 베를린에서 찍어요.
WT: (흥) 아니, 안 믿어!
FO: (깜짝 등장)
WT: (괜히) 왜 왔어?
FO: (멋쩍) 사진 찍으러 왔는데요.
포즈 지시도, 캐릭터 설정도 없었던 단 하루의 매끈한 촬영. 그렇게 두 사람의 협업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 머리 흑인 청년의 변호인단이 <Fantastic Man> 매거진 측에 사진 사용 금지 서한을 전달함으로써 해당 화보는 결국 빛을 보지 못하게 됐다.
틸만스는 사전 협의 없이 이뤄진 초록 머리 흑인 청년의 사진 사용 불허 통보에 대해 큰 실망감을 느꼈지만, 두 사람은 이후에도 연락을 지속했다.
그러나, 초록 머리 흑인 청년의 변덕은 반전의 매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Blonde> 앨범 발매를 3주 앞둔 2016년 여름, 프랭크 오션은 틸만스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이 거부했던 그때 그 사진을 다시 언급하며, 2집 앨범의 커버로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게 된다.
FO: 작년에 찍은 그 화보 사진 있잖아요.
FO: 혹시 그 사진, 제 앨범 커버로 써도 돼요?
WT: (괜히) 생각해 볼게.
편집 매거진의 독점 커버 화보의 맥락에서 촬영된 사진이 음악 작품의 커버 자리로 이동하게 된 우연한 순간이다.
비슷한 시기에 틸만스는 내친김에 초록 머리 흑인 청년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음악들을 들려주었는데, 그중 틸만스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프로듀싱한 테크노 트랙 "Device Control"이라는 노래를 듣고 반해버린 프랭크 오션은 트랙을 극찬하며 앨범의 인트로에 그것을 샘플링해도 될지를 물었다.
FO: 이 노래 쩔어요. 샘플링해도 돼요?
WT: 왜?
이후 프랭크 오션은 <Blonde> 발매 일주일 전, 데프 잼과의 계약 이행을 위한 비주얼 앨범 <Endless>를 발매하며, 틸만스의 원곡 전체를 앨범의 엔딩 트랙으로 싣고 또 인트로에도 포함시키는 파격적인 결정을 선보였다.
모든 걸 신중히 계획하고, 섬세하게 실행하는 '의도의 왕' 프랭크 오션과 틸만스의 우연과 선택의 연쇄 작용이 빚어낸 2010년대 최고의 예술 작품, Endless and Blonde.
결과적으로, 볼프강 틸만스는 초록 머리 흑인 청년의 <Endless>에는 인트로/엔딩 트랙의 제작자로, <Blonde>에는 커버 아트 촬영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프랭크 오션의 4년 공백을 깨부순 두 프로젝트 모두에 깊이 관여한 핵심적인 조력자로 남게 됐다.
프랭크 오션은 많은 걸 기획하고 의도하며 살아가는 치밀한 은둔의 예술가이지만, <Blonde>의 앨범 커버만은 그의 ‘의도’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아니란 점은 정말 흥미롭다. 그리고 오직 이 우연성만이 역설적으로 단순한 앨범 커버를 넘어 뉴욕/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 전시될 정도의, 그러니까,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빛나는 사진의 생명력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여러분, 2026년 1월 1일이 밝았습니다.
우리가 꿈꾸고 그리는 그 무엇이든지 말이죠.
그것들이 당장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운명이 부르고, 세상이 인정하는 순간은
반드시 따로 반짝이며 존재할 테니까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인 거죠.
비록 잡지 화보 사용은 무산됐지만,
1년이 지나 전설의 앨범 커버로 부활한
두 예술가의 드라마틱한 사진 서사처럼요.
아무쪼록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스눕피 배상
■ 2026년 테크노로 스타트!
https://youtu.be/VZisgqJvKUs?si=jtQRcw3tZe0N2Na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