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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Oct 17. 2018

오랜만에 <호밀밭의 파수꾼>

별 볼 일 없지만, 애틋한 소설

  21살의 10월, 나는 진주에 위치한 훈련소에 있었다. 훈련소에서 시간을 잘 죽이기 위해 나는 틈만 나면 작은 다이어리 하나를 꺼내 거기에 아무거나 잔뜩 써 갈기고는 했다. 짧은 일기, 노래 가사, 책의 한 구절, 평생 배운 쌍욕, 좋아했던 사람의 이름, 내 옷에 박혀있던 브랜드 이름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마지막 두 문장을 다이어리의 여기저기에 무지하게 써대길 즐겼다. 마치 그것이 내 좌우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초등학생이 반성문을 쓰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참, 샐린저의 두 문장은 이거였다.


Don't ever tell anybody anything. If you do, you start missing everybody.


  <호밀밭의 파수꾼>은 읽을 때마다 늘 아프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주인공 홀든의 말 하나하나가 너무 짠했고 나를 아프게 하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두고 어떤 출판사는 '감수성 어린 십 대 소년 홀든이 퇴학을 당하고 이리저리 떠돌며 방황하는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나는 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이렇게 소개하고 싶었었다.
'말의 천재 주인공 홀든이 당신의 다 지워져 버린 감수성을 모조리 되찾아줄 방황을 시작한다.' 

어렸을 때, 나는 독후감 발표 시간이 무서웠다. 같은 책을 읽고 친구들과 다른 감상을 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때로는 '오독'이 '정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부터는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각자의 인생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마음을 열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그렇게 마음대로 읽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책 읽기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때로 책 읽는 행위를 너무 거창한 것으로 치켜세우며 졸라게 다그치며 오바하는 너그럽지 못한 태도를 나는 경멸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재미있는 일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편한 일이다. 대충 읽어도 되는 것이고, 거꾸로 읽어도 되는 것이고, 잘못 읽어도 되는 것이 책 읽기인 것이다. 모범 답안을 찾아 정답을 적어내길 강요받았던 우리는 문학을 읽을 때도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자유로운 책 읽기가 한 권의 문학책을 얼마나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그것은 곧 소통의 책 읽기인 것이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야'라는 어른들의 말을 나는 정말 지긋지긋하게 생각했었는데, 나도 어느새 '어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야.'라면서. 주인공 홀든은 이렇게 망가져가는 나를 붙든다. 그리고 묻는다. 인생이 정말 그런 거냐고. 내겐 대답할 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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