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의 어느 날, 나는 인천의 한 대학 수학능력시험 고사장에 들어섰다. 수능 시험을 보기도 전에 이미 수시 전형에 당당히 합격하여 대학 입학을 확정한 부러운 친구 하나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조심스럽게 건넨 꼬깃꼬깃한 노란 부적과 엄마가 싸준 계란말이와 스팸, 뭇국을 담은 도시락 통 몇 개를 가방 한편에 쑤셔 넣고 누구보다도 빨리 집을 나선 후였다.
성실하고 균형 잡힌 학생답게 매우 이른 아침에 텅 빈 교실로 나 홀로 들어가 그 고요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나니 어쩌면 오늘의 시험을 내가 대단히 잘 볼지도 모르겠다는 몹쓸 확신이 일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동병상련의 아픔을 공유한 채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또래들이 하나 둘 교실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같은 학교의 친한 친구들이 같은 교실에 배치되지 않은 모양인지, 서로 얼굴만 알고 있을 뿐 구태여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은 놈들만 여럿 교실에 줄 지어 입장했다.
‘아, 오늘 조용히 수능 칠 수 있겠다. 다행이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페레로 로쉐 초콜릿을 한입 깨물고 곧 있을 1교시 언어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어떤 놈이 내 등을 툭툭 쳤다.
“오, 야! 다행이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오늘 밥 같이 먹자! 오늘 언어 뭐 나올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고등학교 때 2년 간 같은 반을 했던 친구가 서 있었다. 뮤지컬과 연기 입시를 준비하던 그 친구는 뭐가 그리 행복한지 계속 싱글벙글 웃었다.
그날 그렇게 우리는 앞뒤로 나란히 앉아 수능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나도 내심 긴장한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편한 말동무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 친구 덕에 도리어 안정된 마음으로 일생의 대단한 사건 중 하나인 대학 수학능력 시험을 나름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친구와 둘이 뚜벅뚜벅 교문 밖으로 걸어 나오며 나는 집으로 친구는 PC방으로 향하며 우린 헤어졌는데,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는 예술대학의 연기과에 입학했고 나는 문과대학 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서로 연이 닿지 않아 애석하게도 나는 그 친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대신에 나는 다른 친구들을 통해 뜨문뜨문 그 친구의 소식을 전해 듣곤 했는데, 몇 년 전 우연히 드라마를 보다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나는 여기에서 이렇게, 쟤는 저기에서 저렇게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걸 깨달으며 ‘누구나 각자의 인생을 살아 나간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깨달음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언제 한번 그 친구가 열연하는 뮤지컬과 연극을 보러 가겠다고 다짐하는데, 좀처럼 쉽지가 않다(내가 연극이나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 문득 약 13년 전의 겨울, 대학 주변의 한 허름한 지하 노래방에서 그 친구가 열심히 불러재끼던 노래 하나가 생각난다. 지금 막 기억을 떠올려 노래 가사 검색을 해보니 루그라는 밴드의 1집 타이틀곡 ‘죄’라는 노래인데, 뜬금없지만 노래는 참으로 위대하다. 13년 전의 그날로 나를 순식간에 데려갈 수 있는 건 분명 ‘노래’뿐이다. 누구나 어떤 노래를 들으면 내가 그때 그 순간의 나로 돌아가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 그 장소, 그때 그 냄새, 그때 그 공기, 그때 그 바람, 그때 그 햇빛 말이다.
음, 참고로 루그의 ‘죄’는 나로서는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는 종류의 곡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그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 하지만 내가 도저히 좋아할 수는 없는 곡이었다.
2014년 2월의 어느 날, 나는 강남의 한 광고대행사의 인턴 필기시험을 치르기 위해 회사의 대회의실에 입장했다. 필기시험 시간이 임박하고 개성 있는 친구들 열댓 명이 모여 대회의실 테이블에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이윽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빈 에이포 용지 몇 장씩을 받아 쥔 우리들은 답 없는 문제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일필휘지로 휘갈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글의 짜임새를 고민하는 건 사치였다.
그런데 내 맞은편에 앉아 한겨울에 나 홀로 파란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채로 모두의 시선을 빼앗으며 제한 시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꽤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박고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관찰하던 특이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저 사람은 뭔데 저렇게 여유를 부리나?’
오밀조밀 귀엽게 잘생긴 얼굴로 한겨울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던 그 사람을 나는 결국 최종 합격자의 오리엔테이션 현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오리엔테이션 현장에서 나는 그 사람이 나보다 1살이 많은 형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자기소개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나 재학 중인 대학교, 특기 따위를 나열하던 나머지 친구들과 달리 자신의 복잡한 연애관을 자랑하던 그 형의 독특하고 단단하며 또렷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술자리에서 나는 형에게 필기시험이 진행될 때, 답안은 작성하지 않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던 건지 물어보았는데, 그냥 다들 무슨 답변을 쓰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는 다소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인턴 생활이 시작되고 두어 달이 지났을 때, 형이 내게 휴대폰 메시지를 하나 보내왔다. 메시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더 이상 인턴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생각의 핵심은 인턴 생활을 위해 본인의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 비해 자신이 그에 상응하는 어떤 가치 있는 교훈을 얻어갈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름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왔으니 조금 더 다녀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라고 답해주고 싶었지만, 워낙 확고한 자기만의 가치관을 지닌 형이었기에 그저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한다는 답변만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정해진 기간 동안 인턴 생활을 마무리했고, 형은 대학으로 돌아가 학기를 마무리했다. 이후, 몇 번인가의 안부 문자를 주고받으며 나는 형이 꽤 연봉이 높고 안정적인 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는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회사를 퇴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후,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잊고 지내고 있던 형의 소식을 확인한 건 올해 봄이었다. 어떤 대형 방송국의 신입 아나운서가 되었다는 반갑고도 놀라운 인터넷 기사. 텔레비전에서 보는 형의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알 수 없는 어색함에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아나운서라니, 아나운서라니. 음, 아나운서라니.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면 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렸을 땐 왜 내가 아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을까라며 쓸데없이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다. 서른을 코 앞에 두고 이제 명쾌한 해답을 하나 얻게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 그땐 아는 사람들이 조금씩 텔레비전에 나오기 시작한다는 걸. 음, 조금은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