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대 남았는지 각자 생각하고 있어!
“따라 해, 임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비타불. 해 봐.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안 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참다못해 젊은 스님은 목탁 두드리는 막대기로 그 청년의 머리통을 세게 내리쳤다.
“말로 해요. 말로 해요. 아파요. 때리지 말고 말로 해요.”
“따라 해, 그럼.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최인호 에세이 <산중일기> 중에서
한국 나이로 서른인 나와 같은 시대를 거쳐 온 또래들은 학창 시절 대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친구들을 베스트 프랜드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나 또한 그랬다. 나를 포함한 꼬마 다섯이 짝을 지어 항상 같이 어울려 다녔었다. 아파트 뒷산을 타거나 비좁은 주차장에서 가상의 골대를 만들어 축구를 하거나 학교 앞 문구점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거나 버스를 타고 영화를 보러 갔다. 물론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갸륵하게도 우리는 모두가 같은 학원을 다니며 함께 공부를 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같은 시간과 장소를 비슷한 느낌으로 질릴 만큼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부지런히 챙겨가며 이렇게나 컸으니 새삼 놀랍기도 하다.
무엇보다 학원을 함께 다닌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땐 대체 왜 그랬을까?’ 싶은 기억이 하나 뚜렷이 떠오른다. 바로 학원 선생님들의 체벌이었다. ‘학원’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려보라거나 자유롭게 글을 써보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면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손바닥을 세게 맞거나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아파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을 묘사한 생동감 있는 작품을 여럿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우리는 많이 맞았던 것이다.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우리가 그렇게나 쓸데없이 많이 처맞았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이며 의아한 일이다.
다섯 불알친구들과 종합 보습 학원을 함께 다니던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초록색 테이프로 칭칭 휘감은 돌덩이보다도 딱딱한 몽둥이와 함께 우리의 손바닥과 엉덩이는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생각해보면 센세들 정말 아프게도 때렸다.) 나와 친구들은 학원에 ‘배움’에 대한 값을 성실히 지불했지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약간의 ‘가르침’과 잦은 ‘매질’뿐이었다. 나를 제외한 4명의 불알친구들은 중간에 학원을 그만두었다. 고작 ‘약간’의 배움을 위해 비싼 값을 지불하고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기엔 잦은 매질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약 3년의 시간을 계속 맞아가며 그 학원이 문 닫을 때까지 버텼다. 오기도 객기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나만 총애를 받았다거나 벌이나 매질에서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그냥 나는 어느 순간 그렇게 맞아가며 공부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 같다. 심각하게 이야기하자면 당시의 나는 정신적으로 무기력해졌었고 선생님들의 이상한 행동에 반항하지도 다른 단순한 조치(이를테면 학원을 그만두거나 옮기는 단순한 행위처럼)를 취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음, 이런 걸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하나? 정말이지 불만도 많고 늘 투덜거리기를 좋아하는 현재 나의 성격과 대조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참,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들 때리셨나요? 진짜 아팠어요.
덧붙이는 말)
제가 친구들에게 버릇처럼 자주 내뱉는 말 ‘너는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아.’는 출처가 꽤 명확한 것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