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눕피 Nov 30. 2019

인생 첫 면접에서 나는 랩을 했다.

면접 경험이 있는 누구나 가슴에 삼천 원쯤은 있는 거예요!

2016년 10월 말의 일이니까 벌써 3년이 더 지난날의 일이다. 모 광고대행사의 최종면접에서 나는 랩을 했는데, 요즘에도 따뜻한 물로 오래 샤워를 하거나 편한 마음으로 자려고 누우면 가끔 생각나서 나를 못살게 군다. 이 죽일 놈의 뒤끝.


그 가슴 아픈 기억의 조각들을 긁어모아서 어디에라도 몽땅 풀어놓고 싶었는데, 오늘 날을 잡았다. 그래, 브런치가 제격이다. 그날 나는 면접을 말아먹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카페에 들러 그 엿같은 기분을 풀어내기 위해 면접관을 욕하는 글을 노트북 메모장에 일필휘지로 써 갈겼다. 그것의 디테일을 토대로 지금의 감정을 더해 아래에 풀어본다. 할 일도 더럽게 없는 남자, 스눕피의 본질인 것이다.


2016년 10월, 앞서 언급한 대로 나는 모 광고대행사의 최종 면접 자리에 올라갔다. 오래전부터 흠모하던 회사의 최종면접이었기에 내 생각쯤은 차분하게 정리해왔었다. 그야말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의 오만함으로 무장하여.


면접일 아침, 나는 헤어 스타일링에 실패했다. 하지만 다시 머리를 감고 이리저리 매만질 힘이 없었다. 그냥 두기로 했다. 대단히 슬픈 기분으로 일찍 집에서 나왔다. 면접 두어 시간 전,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아메리카노를 가글액 삼아 입을 몇 차례 헹궜다. 쓴 입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워낙 저음인지라 자주 소리 전달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노트북을 열어 회사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들이 그동안 만든 광고 캠페인 몇 가지를 봤다. 그냥 뭐라도 좀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뭐라도 좀 해야만 할 것 같은 그 강박 말이다.


면접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나는 회사 바로 앞 카페로 이동했다. 대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형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형은 작년에 입사한 1년 차 신입 광고인이었다. 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경쟁자가 만만치 않아. 엄청나게 지원했나 봐.”


“그렇겠죠… (한숨) 취업난이 실감이 나네요.”


시간도 엄청 짧다는데? 자기 어필할  있는 시간도 별로 없다네. 그냥 짧게 치는  나을 ?”


“알겠어요. 뭐 부담이 되는 건 아닌데, 언제나 평가를 당하는 위치에 서면 사람이 참 잘아지네요.”


“너 책 좋아하고 그런 거 아마 좋아하실 거야. 파이팅”


그렇게 짧은 대화를 끝내고 면접 시간이 그야말로 임박하여 회사 안으로 이동했다. 작은 회의실에 30명 가까이되는 지원자들이 줄 지어 앉아있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 매우 답답한 회의실 속 열에 들뜬 지원자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는데, 또 한껏 여유를 부리며 각자의 카리스마를 드러내기 위해 열심이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먼저 면접 볼 1조 5명의 이름이 호명됐다. 나는 1조였다. 5명이 일렬로 줄을 섰다. 그리고 면접장 안으로 들어갔다.


5대 5의 다대다 면접이었다. 면접관 중 한 사람이 각자 준비한 자기소개를 짧게 해보라고 했다.


“다들 자기소개 준비해왔죠? 해왔잖아요? 짧게 이쪽부터 한 번 해볼까요?”


'뭐지? 저 재수 없음은?'


 나는 ‘힙합’이라는 키워드를 꺼내어 내 소개를 했다.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있는 그대로 날 드러내고 싶었다. 하루키에게 맥주가 있고 재즈가 있다면, 내겐 힙합과 문학이 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구구절절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로운 면접이란 건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 걸 알았고, 면접관이 직접 언급했듯 그들은 ‘짧은’ 자기소개를 원하는 것 같아서 하수처럼 '카피라이터' 최종 면접 자리에서 '힙합' 얘기를 했다. 그들은 작사가를 뽑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출처: Mark Drew's Charile Brown)


'힙합'이라는 명사가 몰고 올 파장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사뭇 진지한 태도로 그렇게 자기소개를 내뱉고 난 후 공통질문이 몇 가지 던져졌고, 면접관들이 개인에게 궁금한 것을 추가적으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내게도 질문이 던져졌다. 아, 역시나 '힙합’이었다.

힙합을 언제부터 좋아했는가,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가 따위였다. 이윽고 추가 질문이 던져졌다. 아, 또 ‘힙합’이었다. 한 면접관이 힙합을 좋아한다면 랩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를 들은 다른 면접관이 킥킥거리며 피차 민망할 일을 왜 시키느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랩을 할 수 있다고 답했다. 내가 래퍼는 아니지만, 365일을 흥얼거리며 즐기는 게 힙합이고 랩인데? 까짓것, 해버렸다.



Gimme the microphone first, so I can bust like a bubble
Compton and Long Beach together, now you know you in trouble
Ain't nothin' but a "G" thang, baby!

- 지원자 스눕피 -



엉터리 구닥다리 랩을 마치고 나니 머리가 하얘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젠장.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아니, 내가 이러려고 카피라이터가 되려고 했나, 싶었다. 면접관들도 함께 웃었다.




“아니, 여기 무슨 슈퍼스타 K야? 우리?”

- 면접관 A -



(출처: Mark Drew's Charile Brown)



어김없이 면접은 다시 진행되었다. 그들은 반드시 뽑아야 하고, 우리는 기어코 뽑혀야 했기에 면접이 다시 진행되는 것은 마땅했다. 하지만 내 랩으로 싸늘해진 그 찰나의 순간과 이내 면접이 다시 진행되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뽑는 자와 뽑히는 자 사이로 감돌던 전운 사이의 그 형언할 수 없는 단절이 주던 미묘함이란… 그건 그렇고 그날의 내 랩은 대체 어디로 날아간 걸까. 에이, 십할!


면접관들은 자기소개서의 내용보다 이력서 속에 담긴 단편적 사실의 나열에 집중하며 면접을 진행했다. 각자 엄청난 양의 A4용지 묶음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그것은 면접을 보는 5명의 이력서,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가 한데 묶여있는 꼴이었다. 면접관과 지원자 사이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다. 어떤 페이지의 어떤 항목에 면접관의 연필이 멈춰져 있는지, 그런 알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눈을 뜨고 있으면 너무나 잘 보여 애써 시선을 달리 해야 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이력서의 표 위에서만 그들의 연필은 이리저리 맴돌 뿐이었다. 자기소개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눈치였다. 크게 실망했다.

나름대로 꽤 많은 면접을 봐왔다. 방송국부터 광고회사, 주류회사까지, 붙은 곳도 있고 떨어진 곳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당연한 소리만이 물론 아니다. 면접의 결과에 상관없이 면접을 통해 내가 한 단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사건과 그렇지 못한 사건 간의 차이는 언제나 분명했다는 것, 그리고 그 차이를 불러오는 원인은 대개 단 하나로 압축된다는 것, 그들이 지원자에 대해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고 면접에 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자기소개서에 열심히 녹여냈을 하찮은, 그러나 당신에게는 무지하게 애틋할 것이 분명한 당신의 과거 그리고 당찬 포부는 장황할 뿐이요, 우린 바쁜 사람들이고, 수많은 지원자들의 자기소개서를 일일이 읽고 기억해, 궁금한 부분들을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듣고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꽤나 성가신 일이니, 우린 그저 우리가 물어보고 싶은 것만 몇 가지 골라 물어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똑똑한 면접 방식이며, 이런 식의 질문만으로도, 그리고 그에 따른 당신의 답변을 몇 가지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사회생활깨나 한 우리들은 당신의 성격과 태도, 인생의 가치관 따위를 모두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회사와의 궁합까지도 확실히 점쳐볼 수 있는 것이지요, 라는 식의 신적인 태도는 자주 나의 성질을 돋우곤 했었다.


아이고, 나의 이력서 취미란에는 ‘90년대 미국 힙합 음악 감상’이 적혀 있었고, 그들은 자꾸 반복하여 강조하였듯이 시간이 없었다.

자기소개서보다는 이력서를 토대로 지원자를 검증하는 '카피라이터' 최종 면접장에서 그런 내가 힙합을 전도하고 랩을 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취미를 열심히 소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나를 잘 설명하고 싶었다. 젠장. 이것이 바로 셀프 포지셔닝의 완패요, 면접 하수들이 경험을 통해 대대로 전수하는 '면접장에서 바로 써먹는 면접 필패법' 이란 말인가!



(출처: Mark Drew's Charile Brown)




‘우리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빨리 진행할게요. 짧게 대답해주세요.’

‘짧게 할게요’

‘아, 시간이 너무 없다. 저희도 아쉬워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는 30분의 짧은 면접이 끝이 났다. 나는 그렇게 나 홀로 쇼미더머니의 예선에 참가했고, 처참하게 탈락에 성공했다. 루저의 궁상맞은 넋두리는 언제나 불쌍하고 한심하다. 하지만 면접이 끝나고 불현듯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씨, 다른 랩 할걸 그랬나…?’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 나는 멍청해서 성공하긴 글렀다고.


(출처: Mark Drew's Charile Brown)


상처 없는 면접이란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기분 좋은 분위기 속에서 면접을 보고 나와도 '나'를 파는 일은 언제나 매번 다른 종류의 아픔을 몰고 오는 것이다.


나는 누굴 위로해 줄 깜냥이 있는 인간도 아니고, 앞으로 살면서 아마 또 몇 번인가의 면접을 부지런히 보게 될 보통의 인간이다. 그래서 도대체 이 글의 목적이 뭐냐고? 다른 뜻은 없고 광고회사 최종 면접에서 랩을 하고 힙합 음악을 전도하다가 떨어진 멍청한 인간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고 마음껏 비웃어주시길, 그거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언이나 충고는 어디까지나 참고용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