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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Dec 08. 2019

미래 계획에 대해 말할 거리가 궁색한 인생이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현재는 불안하지만 과거는 분명하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현재는 불안하지만 과거는 분명하다.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붙들고 현재를 위무하며 사는 사람을 보면 가끔 짠하다는 생각이 든다. 허구한 날 옛날 얘기나 늘어놓으며 깔깔대는 윗사람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구시대 외국 이론의 끄트머리를 하염없이 긁적이며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을 이야기하려 애쓰는 교수님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유는 분명한데, 그들이 당당하게 늘어놓는 과거 이야기의 면면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 계획이 뭡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틈만 나면 자꾸 내게 미래 계획을 물어보거나 내일은 또 모레는 무얼 할 거냐며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늘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한다. 가끔은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면 내가 너무 한심해 보일까 싶어 속으로 안 해도 될 걱정을 만들어하기도 한다. '잘 모르겠다'라는 나의 대답을 들은 어떤 사람들은 가끔 나를 꾸짖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내게 질문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까먹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먼 산을 바라보며 딴짓에 열중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나도 사실 내 미래를 제일 모르겠다, 라며 공감해주는 어떤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쨌든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할 때의 나는 언제고 정직했다,라고 나는 당당히 맹세할 수 있다.


딱히 좌절하지는 않았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다. 군대를 제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이십 대 초반에는 누군가 내게 미래 계획을 물어오면 미리 준비한 답변을 그럴싸하게 늘어놓았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내가 좀 있어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래 계획의 그럴싸함과 내 속마음의 처참함은 정확히 비례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 앞에 설수록 내 뻔뻔하고 작위적인 미래 계획은 날개를 달고 멋지게 치솟았다. 하지만 그렇게 드러내 놓고 떠드는 작위적인 미래 계획뿐만 아니라 속으로만 품고 간직하던 나름의 미래 계획도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나는 크게 좌절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지겹도록 떠들었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을 나는 대책 없는 비관주의보다는 긍정적 방어주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과거는 분명하니까.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어서나 당장 내 삶 깊숙이 들이고 싶은 몇 가지의 행동, 사고, 관계 등이 물론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미래 계획에 해당한다기보다는 현재의 심리 상태나 취향에 더 가까웠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물어오는 미래 계획이란 직업이나 직장에 관계된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 나는 정말이지 대답할 거리가 궁색했다. 자기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고민이었다고, 대학 시절을 자기보다 알차게 보낸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자신의 '커리어'와 '미래 계획'에 잔뜩 도취되어 격앙된 말투로 인생을 가르치려 들던 어떤 대학 선배의 특강 내용을 노트에 열심히 받아 적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던 스물한 살의 내가 있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사회생활을 해나가다가 피로감에 휩싸여 완전히 지친 어느 날, 나는 문득 그때 그 사람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아, 그 인간 목에 핏대 세우면서 말하던 거 죄다 구라 아니었을까? 따위의 내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되는 멍텅구리 같은 의심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그의 진실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의 이야기를 했을 뿐인 것이다. 생각도 엄청 바뀌어요, 아무튼.


미래는 불투명하고 현재는 불안하며 과거는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과거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땐 그랬지, 라는 말은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름다운 말이다. 무엇 하나 쉽게 점칠 수 없고 어떤 말을 꺼내어 던져도 민감하게 받아들여 별안간 싸우려 드는 무려 2019년 12월에 무언가를 확실히 이야기하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얼마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가.


최근에 스웨덴의 패션 브랜드 Eytys와 협업을 하기도 한 핀란드의 이색 테크노 DJ WINDOWS95MAN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 95의 로고와 인터페이스를 그의 티셔츠, 모자 등에 박거나 사진, 영상의 배경으로 활용한다. 그는 구식 컴퓨터 위에서 엉뚱한 포즈로 사진을 찍거나 그래픽 디자인부터 서체까지 구닥다리 스타일을 고수하며 자기를 영리하게 브랜딩한다. 한국에서는 KIRIN기린이라는 아티스트가 이와 유사한 개인 브랜딩을 보여주는데, 과거를 주름잡던 뉴잭스윙 음악 스타일에 집중하면서 옛날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기 옆으로 데리고 와서 즐기며 논다. 뉴트로 열풍과 복고 열풍에 대해 사회문화적인 이론을 들먹이며 멋지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현재는 불안하며, 과거는 분명한데 과거의 것들이 우리를 움직이지 않을, 움직이지 못할 이유가 또 어디 있겠느냐고. 단순한 걸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또 멋지게 설명하려는 것도 별로 유쾌하진 않은 것 같다.




갑자기 이야기가 어떻게 핀란드의 테크노 DJ와 한국의 뉴잭스윙 아티스트로 번져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미래 계획에 대해 말할 거리가 참으로 궁색한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가슴속에 내일 당장 이런 걸 한 번 해봐야겠다, 장기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라는 정도의 개념은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또 내게 그걸 구체적으로 풀어서 말해달라고 하면, 나는 또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 프런트 이미지 출처: jacatra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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