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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인간이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하여

#10. 열 번째 책) 마르케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역사상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줄기차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서 마르케스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너무도 놀라워서, 마치 도저히 믿기 힘든 마술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만 같습니다.

열 번째 책,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롬비아, 1961.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먹죠. (…)
말해 봐요. 우리는 뭘 먹죠.
-94p中



언젠가는 꼭 이 책에 대해서 쓰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보면 꼭 늘 약간의 불운을 달고 다니는 사람처럼, 어딘가 안쓰럽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끈 그 위대한 소설, <백년의 고독> 때문일까요? 소설이라는 장르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전무후무한 걸작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마르케스' -하면 '백년의 고독', 으로 직결되는 그 절대적인 개연성이 도리어 이 작품을 그것의 그늘에 가려지게 했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백년의 고독> 위에, 짧지만 위대한 이 소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올려놓고 싶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저와 같은 몇몇 독자들이 여기에 분명 공감해 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작품 해설을 쓴 송병선 평론가도 그중 한 명인 듯합니다.


그 당시에 이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상당 기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인정을 받는다. 그럼에도 어쨌든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는 출간되어 존재했으며,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을 쓰기 전에 이미 대작을 쓴 위대한 작가였다.
-97p, 작품해설 1. <위대한 소설의 기구한 운명> 中


이 짧고 단순한 소설에 대한 제 감상을 단 한마디로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위로받는다는 느낌'.

왜 그런지 이제부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지만, 이 소설은 아주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령은 커피 통 뚜껑을 열고 커피가 한 숟가락밖에 남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
-7p中


잔잔하게 시작한 도입부는 계속해서 잔잔하게 이어집니다.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그저 '잔잔하게'.

퇴역한 대령은 매일같이 군인 연금 자격 통지서를 기다릴 뿐입니다. 마지막 내전이 끝난 후 56년 동안, 그는 그 편지 한 통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커피 통이나 뒤적거리며……. 하지만 편지는 여태껏 도착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절대로 도착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는 잊혀졌고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으니까요. 똑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소설은 계속해서 이런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은 채,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소설은 대령과 아내의 일상적 모습을 담는 데 집중할 뿐, 긴장감을 조성하거나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데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풍경, 하나의 고요한 풍경 같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그 고요한 풍경의 시나리오가 맨 마지막 문장에 도달했을 때입니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쌓아온 풍경의 이미지는 대령의 마지막 한 마디 대사에 의해 산산이 무너집니다. 적막을 깨는 하나의 작은 폭발을 연상한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이 보여 주는 첫 번째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령의 마지막 대사.

표현하자면, 이 소설은 사건을 일으키며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며 종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독자라도 그 마지막 문장에 다다랐을 때, "속았다..!" 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아무런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잔잔하게 이어지던 앞의 모든 부분들은, 대령의 마지막 대사를 위해 의도적으로 사건을 배제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모든 힘과 에너지를 마지막 한 문장에 집약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 아주 잘 계산되고 전부 다 계획되어 있었던 것, 따라서 마지막 문장은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마르케스가 말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함축하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의 목적 그 자체이자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 소설은 마지막 문장을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앞의 모든 문장들이 오로지 맨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기 위해 쓰였다는 듯이.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대령의 마지막 대사를 쓰기 위해 마르케스가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라는 작품을 쓴 거라고요.

대단히 치밀하게 쓰인 소설입니다.






이야기 내내 대령은 연금 자격 통지서가 든 편지 한 통을 기다립니다.


마지막 내전이 끝난 이후 오십육 년 동안 대령은 기다리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령에게 도착하는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가 10월이었다.
-7p中


가난한 대령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장 오늘 먹을 음식도 없는 상태에서 무력하게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편지를 기다릴 뿐입니다.

대령 부부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은 오래전 정치 싸움에 휘말려 투계용 닭 한마리만을 남겨둔 채 죽임을 당했고, 아내는 천식으로 고생하며 굶주리고 있고, 이제 정말 남은 거라곤 쌈닭 한 마리 뿐인데, 대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닭을 팔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수탉은 대령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또 마을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수탉은 대령을 대표하는 것이자 마을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암묵적으로 드러나는 집단적 협동이기 때문입니다. 수탉은 대령에게 개인적인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시에 한 마을의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그 수탉의 존재가 한 소시민 혹은 한 조그만 마을의 존재를 은유하기 때문입니다.

수탉은 희망과 저항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수탉은 대령의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종종 타협 불가능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에 타협하며 살지만, 절대로 타협할 수 없고 또 타협해서도 안 되는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절망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먹죠." 아내는 이렇게 물으면서 대령이 입은 티셔츠의 칼라를 움켜쥐고 힘껏 흔들었다.
"말해봐요. 우리는 뭘 먹죠."

대령은 이 순간에 이르는 데 칠십오 년의 세월이, 그가 살아온 칠십오 년의 일각일각이 필요했다. 대답하는 순간 자기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았고 솔직하며 무적이라고 느꼈다.

"똥."

-94p中 마지막 문단.


그 유명한 결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똥."


이 심각한 유머가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는 화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내뱉기 위해 지난 칠십오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이 순간에 이르기 위해 자그마치 칠십오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요.


이 대목은 소설 전체의 플롯과도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똥."이라는 말을 내뱉기 위해 지난 칠십오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말하는 대령의 모습 위에, 마지막 '똥.' 이라는 대사를 쓰기 위해 앞선 94페이지의 지면이 필요했던 작가의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기 위해 칠십오 년을 살아온 대령의 모습은, 마지막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쓴 마르케스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작품이 처음부터 마지막 문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이 보이는 데에는, 작품 속에서 마지막 한 마디를 말하기 위해 존엄을 지키며 살아온 대령의 모습을 우리가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똥." 이라 말할 때, 대령은 자기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았고, 솔직하며, 무적이라고 느낍니다.

여기에 제가 하나를 덧붙여도 된다면, 대령은 자기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았고 솔직하며 무적이라고 느낀 동시에, 아마 자기 자신이 승리했다고 느꼈을 것 같습니다.

승리, 인간성의 승리입니다. 혹은 존엄성의 승리입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썼던 그 유명한 문장,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다.



… 와 결을 함께하는 듯합니다.


대령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죽을지 모릅니다. 천식을 앓는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계속 굶을 것입니다. 언젠가 쓰러질 것입니다. 죽어갈 것입니다, 곧 파괴될 것입니다.

하지만 패배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똥." 이라고 내뱉을 수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수탉을 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수탉을 지켜낸 것은, 그저 수탉 말고도 다른 많은 것을 지켜낸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수탉을 팔지 않겠다는 대령의 고집은 인간 존엄성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질긴 다짐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 "똥." 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자존심이자 품위있는 고집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인간성이 끝내 승리하는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 존엄이 회복되는 장면이자 거룩한 존엄성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장면,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깊은 울림을 주는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마르케스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마지막 순간에 들어간 한 꼬집의 유머 때문입니다.

마르케스와 헤밍웨이라는 두 거장은 소설을 통해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핵심을 풀어내는 방법으로 헤밍웨이가 택한 것이 진정성이라면, 마르케스가 택한 것은 유머였습니다.

블랙 코미디라고 말해도 좋을, 거친 유머, 심각한 유머, 치명적인 유머, 그다지 웃기지 않은 유머…….

그의 유머가 유발하는 웃음은 소위 쓴웃음입니다. 배꼽을 잡고 깔깔 웃어넘어가게 하는 폭소가 아니라 풍자로 승화된 조소입니다.

'똥' 이라는 이 태연한 비웃음의 결과, 독자들의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살며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위로를 바로 이 작품을 통해 받게 됩니다. 생이 아무리 고단하고 고통뿐일지라도, 대령의 말마따나, '인생은 일진의 질풍과 같다' 고 해도, 영원히 편지가 도착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그것에 대고 콧방귀를 뀌며 실컷 비웃을 수 있는 한,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위로를 말입니다.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말입니다.

'똥' 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우리 안의 무언가가 마치 마술처럼 변화하는 듯합니다. 슬픔과 고통이 웃음으로 변화한다는 말로는 이것을 전부 담아낼 수 없습니다. 마르케스의 문학 세계를 두고 '마술적'이라고 평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발휘하는 유머가, 그 결정적인 마지막 한 마디가, 모든 현실의 당면한 문제들로부터 대령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이끄는 것 같습니다.

대령은 웃음으로 위로받고, 품위 있는 고집으로 저항합니다. 그리고 끝내 '똥' 으로 승리합니다.

이제 이 작품을 읽은 누구라도 대령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로합니다. 그리고 누구도 대령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는 무적이니까요.



대답하는 순간
자기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았고
솔직하며 무적이라고 느꼈다.

"똥."

-94p中 마지막 문장.



이 단어는 이제 일종의 주문처럼 들립니다. 마술을 일으키는 주문.

이 주문을 외울 수 있는 한, 우리는 더럽혀지지 않고 솔직하며 무적이 됩니다.





08.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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