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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슬픔이라는 재능

#9. 아홉 번째 책) 심 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슬픔을 승화시키는 언어의 아크로바트. 덕분에 그에게는 슬픔도 하나의 자산이 됩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언어의 곡예, 이 책 속의 문장들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이런 글이 한글로 쓰였다는 사실에, 충분히 뿌듯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홉 번째 책,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 보선, 한국, 2008.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20p, <슬픔이 없는 십오 초>中



작가 심보선이 말하는 슬픔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가슴을 저며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슬픔은 지나가지 않고 저축되나 봅니다.

어떤 슬픔은 엄청나게 커다란가 봅니다.

어떤 슬픔은 개인적이지 않고 보편적인가 봅니다.



여기 실린 58편의 시들을 읽으면서 슬픔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작가는 일관되게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슬픔을 빼놓고는 삶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도무지 없다는 듯이.


그 중 몇 구절만 옮겨보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전락했고
이 순간에도 한없이 전락하고 있다
길 잃은 고양이들이 털을 곤두세우고 쏘다니는
호의가 아무렇지도 않게 흉조로 해석되는이 복잡하고 냉혹한 거리에서
-47p, <전락> 中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다 죽음이 삶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불길한 낱말이다 나는 전전긍긍 살아간다 나의 태도는 칠흑같이 어둡다
-68p, <어찌할 수 없는 소문> 中


가장 뚜렷한 손금인 줄 알았는데
깊이 파인 흉터이듯이
무엇을 쥐었다 베었던가
생각은 안 나지만
손이 아주 아팠던 기억은 있듯이
-91p, <평범해지는 손> 中


할 수만 있다면 시집을 통채로 옮겨 놓고 싶을 정도입니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라는 문장을 잘 들여다보면, 십오 초가 너무나 짧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슬픔이 없는 하루'도 아니고……,) 십오 초는 시 한 편을 읽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니까요.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라는 문장은, 슬픔 없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들은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반대로 슬픔으로 가득찬, 그 외 나머지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마도 이 문장을 반대로 쓰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삶에서 십오 초를 제외하면 오직 슬픔만이 남는다'…….

작가는 슬픔 없이 흘러가는 십오 초가 아니라, 그 십오 초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대해, 그러니까 슬픔과 함께하는 그 무한히 긴 시간에 대해 쓰고 있는 것입니다.

슬픔 없이는 단 십오 초도 견디기 힘든, 너무도 슬픈 시집입니다.






사실 남의 슬픔에 대해 듣는 일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남의 슬픔을 읽으며 나의 슬픔에 대해 생각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신나는 일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슬픔에 대해 생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은, 슬픔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분명 굳이 하고 싶지는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시집은 뭔가에 홀린 듯이 계속해서 읽게 됩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나는 왜 이 슬픔을 끝까지 읽었을까, 혼자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도 문장의 힘 때문이지 싶습니다.


다들 슬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슬픔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 입니다. 슬픔은 딱히 새롭지 않고, 그리 신선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심보선의 슬픔은 유독 놀라운 데가 있는지, 왜 우리를 이토록 새로운 곤경에 빠뜨리는지. 그것은 그가 슬픔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몇 구절만 옮겨보겠습니다.


나는 해석자이다
크게 웃는 장남이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해도
나는 정확히 해석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큰 소리로 웃어야 한다
-50~51p,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中


어젯밤 잠 속에선 채 익지 않은 꿈을 씹어 먹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병에 담아둔 꽃이 다 뜯겨 있었다. 신물 대신 꽃물이 올라오고 발바닥에 혓바늘이 돋았다.
-119p, <狂人行路> 中


우리쯤의 나이면 거리를 활보하며 담배 한 대 물 수 있다. 지긋한 나이의 눈들을 외면하고 짐짓 연기에다 힘줄 세워 내뿜거나 빛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빈번히 담뱃재를 털어내며……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의 세대는 너무 급히 태운 꽁초였다.
-124p, <대물림> 中


할 수만 있다면 시집을 통채로 옮겨 놓고 싶을 정도입니다…….


난생 처음 보는 문장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힘이 이 지독한 슬픔을 끝까지 읽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문장들은 읽는 이의 심장을 문지르고, 발로 걷어차거나 뒤통수를 때릴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문장에서 '힘'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장력(力)이라는 말이 심보선이라는 작가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 단어인가도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슬픔을 하나의 표현 양식으로 승화시킵니다. 우리는 그의 슬픔에서 태어난 언어를 읽습니다. '힘을 가진' 언어를. 그리고 그 슬픔의 언어를 양분 삼아 그는 곡예를 부립니다. 그래서 그 놀라운 언어의 아크로바트를 보고 있으면, 문장이 선사하는 충격, 언어가 부리는 마법에 휩싸이는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집은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기만 한 게 아니라, 도리어 경이로워지는 순간에까지 도달합니다. 따라서 슬픔도 그에게는 하나의 자산이 됩니다. 그가 슬픔의 곡예를 부리기 위해서 슬픔이라는 토대 위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슬픔이라는 터전이자, 슬픔이라는 재능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집의 첫 번째 시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일부만 옮겨 보겠습니다.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 없듯이

(...)

(그러고는 영원한 침묵)

-11~12p, <슬픔의 진화> 中


<슬픔이 없는 십오 초>라는 시집의 문을 여는 첫 시의 제목으로 <슬픔의 진화>라는 문장은 너무도 부당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이어지게 될 혼란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슬픔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 슬픔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의문들, 슬픔이 야기한, 혹은 슬픔이 되어버린 커다란 혼란들을 말입니다.

아마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실컷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또다시 너무나 슬퍼 보이는 슬픔의 역설.


너무 많이 슬퍼한 나머지 슬픔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화자의 표현 중, '모서리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대목은 닳고 닳아 뭉툭해진 모서리와 슬픔을 느낄 줄도 모르도록 무던해진 마음을 일치시키는 표현처럼 보입니다. 말하자면, 슬픔이 그의 마음 어딘가를 파괴한 것입니다. 뭔가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의 한복판에서, 이제는 슬픔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화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그는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 없듯이, 이제 무엇도 자신을 구제해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영원한 침묵뿐이 유일한 방안입니다…….)

너무도 슬픈 시집입니다.






이 시집은 까마득할 정도로 차갑습니다. 대신 읽는 이에게는 뜨거운 무엇이 남습니다.


시를 쓰게 된 이래 줄곧,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사건의 주범이 된 느낌이다. "나는 거기 없었다"라고 강변할 때, 애초부터 '거기'가 없는 기이한 알리바이, 긍정으로 회귀하지 않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시. 그러므로 나는 텍스트로서의 시에 대해선 짐짓 초연하다.


… 라는 작가의 말을 듣고 있자면, 그의 태도가 고스란히 그의 시 속에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토록 차가웠구나,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어떤 슬픔은 지나가지 않고 저축되나 봅니다.

어떤 슬픔은 엄청나게 커다란가 봅니다.

어떤 슬픔은 개인적이지 않고 보편적인가 봅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해설을 쓴 허윤진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존재하는 일보다는 사라지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08.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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