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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이야기는 살아 있다.

#8. 여덟 번째 책) 천 명관, <고래>


거침없는 이야기, 장대한 이야기, 무시무시하고 압도적인 이야기이면서, 오로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고래>는 순전히 이야기하기 위해 쓰인 소설입니다.

그래서 특별합니다.

여덟 번째 책, <고래>, 천 명관, 한국, 2004.






내 평생에
저렇게 큰 물고기는 처음 보는군
-270p中



정말 '고래 같은' 소설입니다. 그 외에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누구든 이 작품의 거대한 스케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고래처럼 거대하고 압도적입니다. 웅장합니다. 그 으리으리한 규모에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거대함으로 말미암아 독자들을 충격에 빠뜨려 놓고, 제 자신은 뻔뻔하리만치 평온해 보인다는 점도 고래와 똑 닮은 부분입니다. 정말이지 '고래 같은' 소설입니다.

따라서 이 소설의 내용을 하나의 짧은 글 안에 담으려는 시도는 번번히 실패합니다. 너무 크기 때문에, 이야기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거대해서 절대로 손에 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른 관점에서 말해보겠습니다.

'이야기라는 하나의 주체' 의 관점으로요.






이 소설,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뿐입니다. 거의 만담에 가까운, 길고 재미난 이야기들. 한 번 발을 들이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이야기의 늪 같습니다. 이야기가 폭주하며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와 이야기가 충돌하고, 이야기들끼리 서로 뭉치고, 혹은 싸우고, 결합하고, 불화하거나 찢어지고…….


온통 이야기뿐인 소설, 그저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그런데, 소설 전체가 이야기뿐이라는 사실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이야기, 말하자면 순도 100%의 이야기. 이것이 우리에게 어색한 이유는 뭘까요?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야기만 있는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 ……
-9p中


<고래>의 첫 문장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여태까지의 독서 경험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 이야기 너머의 것에 더 반응하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 너머의 가치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랄지, 이야기가 주는 메세지랄지, 아니면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이랄지…….

우리는 하나의 문학작품을 대할 때 교훈이나 메세지와 같은 가치들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가 주는 메세지는...?

<변신>에서 카프카가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1984>에서 오웰이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은...?

<햄릿>에서 배울 수 있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는...?


독자로서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 너머의 가치에 더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아니라 주제의식입니다. 서사가 아니라 담론입니다.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야기가 품은 함의가 중요합니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속의 상징성과 메타포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조금 격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까지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이 없고, 늘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발판의 역할만 할 뿐입니다, 라고. 이야기 자체는 별로 가치가 없으며, 대신 어떤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야기가 이용될 뿐입니다, 라고.



그런데, 정말 그렇게 말해도 괜찮을까요?

이야기는 늘 다음 단계로 가는 발판이어야만 할까요?

이야기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가 될 수는 없을까요?

오로지 이야기를 위해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소설 <고래>가 이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춘희는 뭔가 더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미처 입을 뗄 사이도 없이 둘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광대한 성간에는 희미한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꼬마 아가씨, 안녕.
코끼리, 너도 안녕....
-421p中


<고래>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입니다.

400여 페이지에 걸친 이 방대한 이야기 속에는, 이야기 그 자체만 있을 뿐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래>에는 우리가 이전에 '가치' 라고 불렀던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메타포가 없습니다. 상징이 없습니다. 사회적인 메세지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풍자가 없습니다. 교훈이 없습니다. 비판 의식이 없습니다. 날카로운 질문이 없습니다. 통찰이 없습니다. 일깨워주고자 하는 삶의 지혜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없습니다. 저항정신이나 투쟁의 의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야기만 있고, 이야기 '너머' 는 없습니다. 이야기가 그저 이야기로 끝납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이야기'는 하나의 주체가 됩니다.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기 전에, 이야기가 먼저 살아 움직입니다.

만약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 속 인물들이 말하고 먹고 걸어다니는 게 아니라, <고래>라는 '이야기'가 말하고 먹고 걸어다니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면, 아마도 성공적인 독서를 했다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살아서 움직입니다. 마치 고래처럼, 그 집채만한 몸을 이끌고.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이야기' 자체가 주인공 같습니다. 춘희의 이야기도, 금복의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의 이야기. 이야기가 주인공인 이야기.

<고래>가 해낸 성취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자체를 하나의 가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오로지 이야기하기 위해 쓰인 소설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또 한번 그 틀을 뛰어넘게 되는 것입니다.

<고래>가 보여준 이야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힘을 갖는 이야기이자 '주체'로서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그래서 특별합니다.


이 작품이 문학동네 소설상의 후보작으로 나타났을 때 많은 심사위원들을 당황하게 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누구든 이 작가의 입심에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모든 이야기의 성찬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 역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소설이란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소설에 대한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427p 은희경 작가의 심사평 中


진정한 소설이란 '이야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더 나아가 그 다음 단계의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은희경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약간 거창하게 말해도 된다면, 자신과는 소설관이 다른 심사위원의 동의까지 얻어냈다는 사실이 작가로서는 힘있는 출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428p 은희경 작가의 심사평 中


라고 쓰며, 자신도 끝내 이야기의 힘에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그만큼 강력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야기의 힘, 살아 있는 이야기의 힘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잘 만든 이야기 하나가 갖는 놀라운 힘, 순수한 힘. 천명관이라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이기에 만들어낼 수 있었던 힘이지 싶습니다. 그 힘에 압도당하는 경험은 정말로 유쾌한 독서 경험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로 고래 같은 소설입니다.





08.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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