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평연습 Oct 31. 2021

어느 순간부터 '흰'이 '힘'으로 읽힌다.

#7. 일곱 번째 책) 한 강, <흰>


작가 한 강은 많은 것들을, 이를테면 슬픔, 연약함, 기억, 애도, 아름다움, 웃음, 사라짐… 같은 것들을, 전부 흰색으로 처리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흰색에서 또 무엇을 발견할 수 있나요?

일곱 번째 책, <흰>, 한 강, 한국, 2016.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128p中



이 작품에 대해서는 쓸 말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보다 느끼는 일이 더 중요한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의미가 아니라 감정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숨겨둔 메세지를 찾고, 상징과 비유를 해독하는 일이 아니라, 오롯이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일, 감정을 느끼는 일 말입니다.

아마 한 강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소설 <흰>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독자들이 분석보다는 공감으로 이 글을 읽어 주기를 바라면서.






어떤 소설은 즐거움을 주기 위해 쓰입니다. 어떤 소설은 위로해 주기 위해 쓰입니다. 또 어떤 소설은 슬픔을 나누기 위해 쓰이거나 덜 외롭기 위해 쓰이고, 심지어 어떤 소설은 고통을 주기 위해 쓰입니다.

어떤 소설은 정치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쓰입니다. 어떤 소설은 정치적이지 않은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쓰입니다. 어떤 소설은 미(美)를 추구하기 위해 쓰입니다. 또 어떤 소설은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나 보답하기 위해 쓰이고, 또 어떤 소설은 실험하기 위해 쓰입니다. …….


그런데 소설 <흰>은, 살기 위해 쓰인 것만 같습니다.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10p中


'흰' 것들에 대해 쓰겠다고 다짐한 봄, 화자가 처음으로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강보

배내옷

소금

얼음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 그리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나올 것이다. …
-10p中


무엇이 흘러나올까요? 화자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흘러나올 것들을 말입니다.

'흰' 것들, '흰'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흘러나오게 될 문장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흰색은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기

백발

침묵

사라짐

사라지는 것

곧 사라질 것

작별

애도

아름다움

그러나 사라질 아름다움

슬픔

슬픈 기억

(겨우) 웃음

연약함

죽음

혹은 죽음과 다름없는 무엇


흰색은 그가 가진 모든 연약함입니다. 나약함입니다. 두려움이고, 외로움이고, 부끄러움이고, 슬픔이고, ……

따라서 흰색을 건드리면, 그는 아플 것입니다. 흰색은 그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곳을 건드리면 다른 곳보다도 몇 배는 더 아파할 것입니다. 마치 활로 철현을 켜듯,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그 서럽고 아픈 소리가 날 것입니다. 상처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기에 화자는 망설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들을 만져도 될까, '흰' 것들의 이름을 불러도 될까, '흰' 단어를 적어도 될까, <흰>을 써도 될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웠던 화자는 오랫동안 글쓰기를 미뤄 왔습니다. 그러다 두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을 무렵,


(담담하게) 깨달았다.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11p中


… 라고, (담담하게) 마음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다짐에 대해, 결국엔 <흰>을 써 보겠다는 이 용기에 대해, 화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11p中


자신이 특별히 용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고,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흰 것에 대해 쓰는 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음을, <흰>을 써 내는 일이 자신에게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써야만 하는 글이었다고.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128p中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소설 <흰>은, 누군가의 지극한 기도라고.


우리에게도 '흰'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흰', 저마다의 '흰'.

이 작품은 우리들 각자가 갖고 있는 '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끔 합니다. 각자의 연약한 부분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기도하게 합니다. 죽지 말자는 기도, 쓰러지지 말자는 기도, 이겨 내자는 기도, 살아 남자는, 살아가자는 기도.

이 대목에서 저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서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이지만 한 자리에 모여 같이 기도합니다. 상대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각자 저마다의 간절함이 있습니다. 저마다의 흰색을 떠올리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죽지 말자는 기도, 쓰러지지 말자는 기도, 이겨 내자는 기도, 살아 남자는, 살아가자는 기도…….

바로 그런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소설 <흰>은, 이처럼 '기도하듯' 읽게 됩니다.

각자의 흰색을 떠올리며 각자의 간절함을 작품에 대입하며 읽으면, 어느새 이 텍스트를 읽는 일이 극진한 기도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따라서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작가가 흰 것에 대해 쓰는 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는지, 왜 <흰>을 써 내는 일이 불가피한 일이었는지, …… 왜 이 글을 반드시 써야만 했는지를 말입니다.


소설 <흰>은, 살기 위해 쓰인 글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쓰인 글이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살아가기 위해 쓰인 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살기 위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살아갈 힘이 없어 연약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한 강 작가는 그것을 '흰색'으로 표현했습니다.

강보, 배내옷, 젖, 흰 뼈, 수의, 재 ……, 모든 흰.

세상 모든 '흰'을 위한 기도.

이 책은 바로 그런 지극함으로 쓰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흰'이 '힘'으로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왜 흰 새가 다른 색의 새와는 다른 감동을 주는 것인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왜 특별히 아름답게, 기품 있게, 때로 거의 신성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74p中


제가 대신 대답해 보겠습니다.

아마도 그건, 수많은 색들 중에서도 오직 흰색으로만 표현 가능한 것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오직 흰색만이 표현 가능한 것이 있기 때문에, 오로지 흰색만이 그것들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살아갈 힘'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08.22.21.

instagram : 우리 시대의 책읽기(@toonoisylonelinesss)

naver blog : blog.naver.com/kimhoeyeon

작가의 이전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