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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

#6. 여섯 번째 책) 존 어니스트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이 방대한 소설을 읽는 최선의 방법은 그저 묵묵하게 따라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

숨 죽인 채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신비하고 초월적인 감동과 만나게 됩니다.

인간 내면의 꺾일 수 없는 힘, 그 신비로움에 관해 스타인벡만큼이나 헌신적으로 탐구했던 작가가 또 있을까요?

그는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했던 작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이런 작품을 써낼 수밖에 없었던 작가입니다. 아름답고 경이롭습니다.

여섯 번째 책, <분노의 포도>, 존 어니스트 스타인벡, 미국, 1939.






이것이 폭발의 시초다.
이것이 시작이다.
'나'에서 '우리'로 변하는 것이.
-BOOK1, 317p中



우리는 한 가지를 배웁니다. <분노의 포도>를 읽고 나면 우리에게는 분명한 한 가지가 남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운 게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배웁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당연한 말이지만, 이젠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사실, 낡은 것, 유행이 지난 것, 케케묵은 것, 그것을 다시금 새롭게 배웁니다.

바로 '연대'를 배웁니다. 정확히 말하면, '연대' 라는 단어를 다시 배웁니다.


스타인벡은 이 길고 장대한 작품에서 단 한가지만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질문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탁월한 예술 작품들은 주장하지 않고 질문해 왔습니다. <분노의 포도>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



" 우리가 왜 인간입니까……? "



이 질문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 같습니다. 반드시 대답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왜 거북이나 토끼가 아닌지, 돼지나 침팬치가 아닌지, 정확히 말해 어떤 점에서 그들과 다른지,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지. 우리가 어째서 인간인지,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무엇인지…….

이 함정과도 같은 질문은 잔인하리만치 우리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올바르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스타인벡이 던진 이 질문은 시퍼렇게 날카롭고 너무도 예리해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베일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 이 질문은 앞선 세대의 수많은 작가들이 해 왔던 작업이었습니다. "인간이 왜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문학작품의 근간이자 근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로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진지한 통찰/문제제기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분노의 포도>는 그 계통을 이어받아 쓰인 인간에 대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적 질문에 대해 스타인벡이 내놓은 답을 따라가는 과정은 정말 아름답고 경이롭습니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밀려오는 커다란 감동과 여운의 이유를, 바로 이 책이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인간을 위해 쓰였다는 점에서 찾고 싶습니다.


<분노의 포도>를 읽는 일은, 우리가 왜 인간인지를 설명하는 스타인벡의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 그들은 피로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과 부딪쳐 패배했기 때문에.
-BOOK2, 203p中


먼저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30년대 초반, 미국에 대공황이 찾아왔을 시기가 소설의 배경입니다.


트랙터가 나쁜 것인가? 길게 고랑을 그리며 땅을 갈아 엎는 그 힘이 잘못된 것인가? (…)
이 트랙터는 두 가지 일을 한다. 땅을 갈아엎는 일과 우리를 이 땅에서 쫓아내는 일. 이 트랙터는 탱크와 거의 다르지 않다. 둘 다 사람들을 위협하고 상처를 입혀서 쫓아내 버린다. 우리는 이 점을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BOOK1, 316p中


한순간에 거대 자본에 휩쓸려 땅과 집을 잃은 수만 명의 소작농들. 그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채 반강제로 캘리포니아로 떠나게 됩니다. 그곳에 가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에 가면 마음대로 오렌지나 포도를 딸 수 있다면서? ……
-BOOK1, 173p中


하지만 억지로 끌려 간 유토피아가 실은 유토피아가 아니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옥한 땅, 넘쳐나는 음식들과 과일들……, 평화와 풍요의 땅, 캘리포니아.

그러나 이곳에서 수만 명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죽을 듯이 일하지만 먹지 못해 말라갑니다, 병듭니다, 쓰러집니다. 살기 위해 일합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급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일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일하면서 죽어갑니다.


이곳에 먹을 것이 부족한 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사지 못하는 과일들이 그냥 버려집니다. 버려진 오렌지와 감자를 주우려고 하면 경비들이 총구를 들이밉니다. 떨어진 오렌지들에는 이미 휘발유가 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썩은 감자와 오렌지를 지켜봅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산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 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익어 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 간다.
-BOOK2, 255p中


정말 잔혹한 장면입니다…….






서부의 주들은 새로 시작되는 변화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다. 필요가 생각을 자극하고, 생각은 행동을 불러 온다. 50만명의 사람들이 이주하고 있으며, 마음이 들뜬 100만명이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1000만명이 처음으로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트랙터들은 텅 빈 땅에서 무수한 고랑을 파며 땅을 갈아엎고 있다.
BOOK1, 317p中


트랙터의 등장, 사람의 수백 배의 일을 하는 그 공포스러운 기계의 등장, 그리고 거대 지주의 등장, 토지 회사의 등장, 정체를 알 수 없어 더욱 두려운 거대 자본의 등장, 그 괴물 같은 시스템의 등장…….

제 집앞의 작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몇 대째 살아가던 농부들에게, 이런 것들의 등장은 세계의 전복이라 할 만큼 위협적이고 압도적인 것이었습니다.

작은 집에서 먹고 자고, 작은 땅 위에 농사지으며 살던 그들의 '세계'는 거대 자본의 물결 앞에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소작농들의 작은 세계를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손쉽게 뒤집어 엎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이러한 대공황의 시기를 두고, 성실한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꿈과 신화가 깨져버린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성실한 노력과 정직한 노동으로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합리적인 세계, 이성적인 세계. 그런 것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대공황의 시대를 살아가는 소작농들에게 남은 것은 고통과 완전한 절망, 완전한 패배감뿐이었습니다.

자본의 논리가 만들어낸 인본의 비논리였습니다.


… 그리고 천막촌 전체에 자포자기에 가까운 절망이 퍼져 있었다.
-BOOK2, 29p中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톰 조드 일가라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조명하던 소설이 더 넓은 범위로, 무섭도록 확장되기 시작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들처럼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온 사람들, 그들처럼 집과 땅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사람들, 고향과 친구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처럼 아이와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 시스템에 패배한 사람들, 절망하는 사람들……, 그들과 같은 사람들.

이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세대의 이야기로, 개인의 이야기에서 집단의 이야기로, 인물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놀라운 확장입니다. <분노의 포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일종의 전환을 이루어 냅니다. 바로 '연대'라는 지점에서 말입니다.


저녁이 되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무 가족이 한 가족이 되고, 아이들은 모두의 아이들이 되는 것이다. 고향을 잃어버린 슬픔은 모두의 슬픔이 되고, 서부에서 황금같은 시절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꿈도 모두의 꿈이 되었다.
어떤 아이가 아프면 스무 가족에 속한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천막에서 아이가 태어날 때면,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밤새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침묵을 지키다가 아침에 기쁨을 함께 나눴다. 전날 밤만 해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이 이제는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줄 선물을 찾으려고 자기들이 가져온 물건을 뒤졌다.
저녁에 스무 가족은 불가에 둘러 앉아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가 되었다.
-BOOK1, 406p中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커다란 전환이자 확장, 화자에 따르면- '폭발의 시초' 입니다.

그들은 '하나가 된다', 라는 문장이 일으키는 폭발입니다.


사람들은 하나가 되고, 뭉치고, 힘을 합칩니다. 결속이자 연대입니다. 파괴와 폭력에 저항하는 연대입니다. 개인이 공동체가 되는 순간.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물론 미약한 연대입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연대입니다. 하지만 엄연한 연대입니다.

따라서 이제 이야기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분노의 포도>가 절망의 이야기, 죽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극복의 이야기이자 생명의 이야기로 읽히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연대할 수 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여전히 희망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제 우리는 스타인벡이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고자 했던 그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 우리가 왜 인간입니까……? "



<분노의 포도>를 제대로 읽었다면, 누구라도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게 됩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공동체라는 선(善)을 믿기 때문에.






<분노의 포도> 마지막 장면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사랑으로 이어진 연대란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기서 결말 내용을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 그녀의 입술이 한데 모이더니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BOOK2, 473p, 마지막 문장.


이 상징적인 결말을 두고서 혹자들은 '인간의 신비로움에 의존하여 결말을 맺었을 뿐, 치열하지 못하다' 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비판이 치밀하게 전개되어 오다가 갑자기 너무나 신비롭고 감상적인 결론으로 치달아 버린 것은 아니냐며.


하지만 저는 이 장면이 갖고 있는 강한 에너지, 인간 근성에 깊이 배어 있는 강한 생명으로의 회귀를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아. 사람들은 나아가는 거야. 조금씩 변화한다 해도, 우리는 계속 나아가는 거야.
-BOOK1, 91p中


이 대사는 우리 내면의 어딘가를 두드리는 힘이 있습니다. "죽지 않아…… 나아가는 거야……" 라는 문장은 작품 속에서 땅거북이 강인하게 살아남는 모습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생명력. 그 끈질긴 생명으로의 의지. 생명에 대한 찬사입니다. 작품 속의 그 강한 힘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힘이란 설득력이자 믿음입니다. 여전히 인간을 믿게 하고,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설득시킵니다.

이 소설이 이루어낸 중요한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짜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분노의 포도>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일까요. 이 작품에는 정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딱 한 명만 꼽아야 한다면, 누굴 골라야 할까요?

저는 톰 조드가 아닌, 조드의 어머니나 그 외의 가족들도 아닌, 목사 케이시를 꼽고 싶습니다.


소설 속 케이시는 신앙을 잃어버린 늙은 목사입니다. 그가 '신앙을 잃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건 모든 남자와 여자인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바로 성령인지도 몰라. 바로 인간의 정신.
-BOOK1, 50p中


그리고 케이시의 이 대사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목사는 공백이 되어버린 신의 위치에 인간을 올려놓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과거 성령이 차지하던 자리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대신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신 대신 인간을 믿게 된 것입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구원을 찾게 된 것입니다.

'신을 잃어버린 후에 인간을 되찾았다' 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저는 스타인벡이 바로 케이시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믿었던 사람, 인간에게 끝없는 신뢰를, 그것도 거의 종교적이라 할 만큼의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 내면의 꺾을 수 없는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힘을 신뢰하며 그 숭고한 사랑으로 이 작품을 써낸 것만 같습니다. <분노의 포도>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인간을 믿지 않고서는 절대로 써낼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포도> 속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다름아닌 케이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스타인벡이라는 작가의 페르소나이며,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전부 케이시의 입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자기만의 영혼은 없"으며, "사람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케이시의 말은, 우리가 하나일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대하여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저는 우리가 하나일 때
너무나 거룩해진다는 생각,
인류가 하나일 때 거룩해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BOOK1, 173p, 케이시의 대사.



내가 우리로 통합될 때 생겨나는, 거룩한 공동체의식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배웁니다.






모여 있는 남자들의 얼굴에서 공포가 사라지고 분노가 나타났다. 여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아직 파국은 오지 않았다. 두려움이 분노로 바뀔 수 있는 한, 파국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BOOK2, 432p中


영롱한 빛깔의 열매들이 열렸습니다. 주렁주렁 열린 포도들, 오렌지들, 사과들…….

그리고 영롱한 빛깔의 분노가 사람들의 눈 속에 있습니다. 두려움이 분노로 바뀔 수 있는 한, 파국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보랏빛 분노는,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는 인간이라는 증거입니다.


<분노의 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하는 소설입니다.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모든 걸 빼앗겼다 해도,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진다 해도, 고통과 슬픔 뿐이라 해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살아남는 이야기. 극복의 이야기이자 생명의 이야기.


이 작품에서 불행한 소작농들은 끝까지 일어서지 못합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계속해서 어린 아이가 죽고, 열심히 쌓은 둑은 무너집니다. 세상은 이들에게 쉽게 희망을 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건 분명히, 그리고 여전히 '인간'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작품입니다.


인간이 존엄성을 잃지 않고, 그 모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에. 그래서 이 작품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분노로 바뀔 수 있는 한, 파국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08.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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