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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농담이 무겁게 착지하는 지점, 그리고 재도약

#11. 열한 번째 책) 김 중혁, <나는 농담이다>


코미디를 위해서는 슬픈 얼굴을 감춰야만 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슬픔을 양분 삼아 남을 웃게 만드는, '광대' 라는 오래된 모티브입니다.

따라서 잘 들여다보면 농담만큼 진지한 것도 없습니다.

열한 번째 책, <나는 농담이다>, 김 중혁, 한국, 2016.






저는 어디에 살 건지 정했습니다.
저는 말 속에 살 겁니다.
말 중에서도 농담 속에 살 겁니다.
-195p中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화자.

말장난, 유머, 코미디, 웃음거리…….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가볍습니다. 인물들의 대사가 가볍고, 분위기가 가볍고, 농담조의 문체가 가볍고, 그런 텍스트가 가볍고, 이 책도 가볍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가벼운 소설', 가볍게 읽어도 좋은가 하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힘듭니다.


농담에 그냥 한 번 웃고 가는 게 다가 아닐 거라는, 모종의 함정 같은 것이, 기묘한 의미심장함이 느껴집니다. 농담이란 건 그리 간단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짜 중력이라는 건 그런 겁니다. 우리를 마구잡이로 끌어당기는 건 아니라 이겁니다. 신은 딱 적절한 정도로만 중력을 만들어 놨어요. 우리가 하늘을 날아갈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쓰러질 정도도 아니에요.
-37p中


농담에는 운동성이 있습니다. '배꼽을 잡고' 웃는다던가, 폭소를 '터뜨린다' 라던가 하는 표현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농담이 자극하는 것은 우리의 운동성, 따라서 거창하게 말하자면 농담이란 우리에게 하나의 사건이자 현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농담이 일으키는 운동이란 게 참 특이합니다. 가볍게 튀어올랐다가 무겁게 내려앉습니다. 깔깔대며 웃다가 이내 심각해지거나, 장난이 갑자기 진지해지는, 일종의 '전복'이 일어납니다.

가볍게 박차고 일어나더니 이내 무겁도록 짓누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농담의 두 얼굴, 농담이 가진 두 얼굴의 운동성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농담이라는 '사건'은 두 가지 양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인데, 먼저 1) 우리는 웃음을 터뜨립니다. 피식, 하는 소극적인 웃음일 수도 있고 와하하, 하며 참지 않고 쏟아내는 폭소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볍게 튀어오른다, 고 표현하겠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2) 그렇게 정신없이 웃고, 또 웃고, 다른 일은 다 잊고 즐거워하다가 문득, 슬픈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농담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발견했기 때문에, 농담의 웃음 뒤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심각해집니다. 이것을 무겁게 내려앉는다, 고 표현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둘이 합쳐 가볍게 튀어올랐다가 이내 무겁게 내려앉는, 하나의 별난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이 두 얼굴의 운동성이 바로 농담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사건' 인 것입니다.


농담이란 이와같이 상승과 하강으로 연결되어 있는 운동입니다. 부지런히 올라갔다가 축 쳐져서 내려옵니다. 통통 튀다가 시무룩하게 가라앉고 맙니다.

농담 속에 산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광대' 라는 오래된 모티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코미디언이라고 무조건 웃긴 얘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23p中


자신의 슬픔을 감추고, 아픔을 숨긴 채 그것을 양분 삼아 남을 웃기는 광대의 모티브.

광대의 웃음 뒤에는 언제나 울상이 된 얼굴이 존재합니다. 상처로 가득한 슬픈 얼굴을 유쾌하게 웃고 있는 가면 뒤에 숨긴 삐에로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것이 되었습니다.

코미디를 위해서 내 슬픔을 이용하는 것, 작은 웃음을 위해 내 아픔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대의 코미디는 슬픈 코미디입니다. 광대의 웃음은 언제나 슬픈 웃음입니다. 웃음과 울음이 기묘하게 섞인 그 얼굴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광대나 삐에로의 이미지가 공포영화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것 역시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송우영은 이러한 광대의 모티브를 전면에 내세워 만든 인물입니다.


송우영은 코미디 노트를 꺼내 열심히 적었다. (…)
생각과 사실을 쓰고, 그걸 가장 웃기게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모든 것을 코미디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덕분에 송우영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42p中


작가는 송우영이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독자들에게 슬픈 농담을 던집니다.

이 농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1) 가볍게 튀어오르는 지점이라기보다는, 2) 무겁게 내려앉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웃음을 내세운 가면보다는, 그 뒤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를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우리를 '농담이 무겁게 착지하는 지점'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작품이 슬프고 무거운 소설이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어디까지나 농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얘기한 건 작가의 말이 아닙니다.
작가의 농담이에요.
여기 적힌 모든 게 진짜라고 믿지 마세요.
-238p, 작가의 농담中


한 소설의 마무리를 짓는 말로 '여기 적힌 모든 게 진짜라고 믿지 말라'는 말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읽는 이들은 이야기에 이입하며 '믿고 싶어' 하니까요.

그래서 아마 몇몇의 독자들은 이 부분에서 작가에게 분개하고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으나, 마지막 '작가의 농담' 덕분에 이 소설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가볍게 튀어오르는' 데에 성공합니다.


<나는 농담이다>를 읽다 보면, 기쁨과 슬픔 사이를, 그 극과 극 사이를 수차례 반복적으로 오가게 됩니다. 즐거웠다가, 슬퍼졌다가, 다시 웃다가, 또 슬퍼지다가……. 두 얼굴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것, 김중혁 작가 역시 스스로 '웃기는데 슬픈, 진폭이 큰 이야기를 그렸다' 고 말한 바 있기도 합니다.

이른바 도약→착지→재도약→착지…… 의 파동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진지해서, 농담 한 번 쳐 봤다는 작가의 말대로, 이 소설은 마지막으로 도약하며 끝납니다.


제 남자친구도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에요. 저보다 웃기지는 않지만, 서 있는 건 잘하더라고요. (…)
지금까지 저는 세미였고요, 행복한 밤 보내세요
-231p中


마지막 문장입니다.

진폭이 큰 농담이라는 파동에서 도약의 순간을 마지막 장면으로 포착했다는 것은, 분명히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착지가 아니라 도약입니다. 이것이 <나는 농담이다>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가 됩니다.

그럼 이만 작중 송우영의 한 대사를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저는 어디에 살 건지 정했습니다. 저는 말 속에 살 겁니다. 말 중에서도 농담 속에 살 겁니다. (…)
나중에 농담할 일이 있으면 농담 속을 잘 들여다 보세요. 거기에 제가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사와 전치사 사이에, 아니면 명사와 동사 사이에 제가 살고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농담이었고요, 저는 토요일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195p中





09.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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