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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읽고 나면 그림자가 희박해진다, '白의 그림자'.

#12. 열두 번째 책) 황 정은, <百의 그림자>


가끔은 따뜻한 글이 고플 때가 있습니다.

국물처럼요,

읽고 나면 배가 따뜻해지는…….


여기, <百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열두 번째 책, <百의 그림자>, 황 정은, 한국, 2010.






나는 이렇게 차가운 음식 말고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어요.
국물이요,
먹으면 배가 따뜻해지는, …
-147p中



꼭 이런 소설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말을 건네줄 소설이, 꼭 필요하다고, 우리는 이런 글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참 반갑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요.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한 문장으로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그는 이내, 그림자가 일어섰다고 말합니다. 선술집 앞에서 우산을 펼치다가 그도 모르는 틈에 일어선 그림자를 목격하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19p中


그림자가 - '일어섰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만납니다. '그림자' 라는 주어에 '일어서다' 라는 서술어가 붙자,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기괴함이 연출됩니다. '그림자가 일어섰다', '일어선 그림자' 라는 표현들은 생소할 뿐더러 그 의미를 알기도 어렵고, 주어와 서술어 사이 호응의 어긋남으로 말미암아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표현에는 의도적으로 불완전하게 만들었거나 일부러 부조화를 꾀한 듯한, 의도된 결함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불완전한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예요.
-20p中
그림자가 일어났다고 말하자 여 씨 아저씨는 눈을 깜빡였다.
-30p中
그래서 내 그림자가 일어섰을 때, 라고 여 씨 아저씨가 말했다.
-43~44p中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46p中


불완전한 언어가 이처럼 반복됩니다. 독자들 중 누구도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일어선 그림자를 따라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설명 없이 자꾸 그림자가 일어섰다느니, 그림자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느니 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은, 이 말이 뜻하는 바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도 그림자가 몸을 따르지 않았다. 그림자 끝이 고정된 채로 몸만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솟아오른 그림자 쪽으로 자연스럽게 중심이 가 버린 듯하고, 사슬에 묶인 발목처럼, 아니 끈에 묶인 개처럼, 아니 중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컴퍼스처럼,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133p中


의미의 해석만을 염두하며 읽다 보면, 위의 장면이 흡사 판타지처럼 읽힐 것입니다. 마법이 일어나 그림자가 살아난다는…….

그러한 오독을 방지하기 위해 독자로서 해야 할 일은, 언어를 해석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림자가 일어나고 그것을 따라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를 고민하지 말고, 그 표현이 불러 일으키는 '이미지' 에 초점을 맞춰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百의 그림자>에서는, 그림자가 일어선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작중 그들은 각자의 '그림자가 일어섰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이야기를 글로 묘사하는데, 아무런 설명 없이 불친절하게 묘사합니다, 불완전한 언어로 전달합니다.

따라서 그 텍스트를 읽고 있자면, 명확한 하나의 정보, 말의 정확한 포인트를 짚어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이미지만을, 어렴풋하면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이미지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미지들.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애매한 표현이 의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정리되지 않은 산발적이고 어지러운 이미지들을 간신히 인지할 뿐입니다. '그림자가 일어섰다'고 말할 때, 아무도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대신 이미지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두루뭉실한 그 무엇만이 남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 우리는 그렇게 몇 가지의 이미지(혹은 어떤 잔상 같은 것)을 겨우 건져낼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표현들이 반복되는 것을 읽으며 도통 알 수가 없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느꼈다면,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원인을 알 수 없고 정체모를 어떤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 역시 정상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먼저 불완전한 언어가 있습니다. 결함을 안고 있는 언어. 의도적으로 어딘가 어긋나도록 설계된 언어는 읽는 이를 정확한 어떤 지점으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그림자가 일어섰다...?) 빙빙 돌고, 헤메며, 어지럽게 떠다닙니다, 부유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 글은 분명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특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 무언가를 느끼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느낄 수는 있지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종의 식물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설명할 유일한 수단인 언어가 결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정체불명의 감정은, 특정화되지 않고, '정의되지 않는 것' 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림자가 일어섰다'는 말은, '슬픔' 이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우울' 이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어떤 말로도 특정지을 수 없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자가 일어섰다는 말은, 그림자가 일어섰다는 말로만 표현 가능합니다.

따라서 작가가 써 놓은 모호한 표현들의 의도를 여기서 발견해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황 정은 작가는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어떤 커다란 개념을, 정확히 특정지을 수 없는 광범위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언어가 모호해지자 소설 속 많은 것이 흐릿하게 보이면서, 독해의 가능성이 광범위해집니다.


'그림자가 일어섰다' 를, 누군가는 '외로움이 커졌다', 고 읽을 수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는 '슬픔을 이길 수가 없다', 고 읽을 수도, 아니면 '정신을 잃고 주저앉는다' 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 속 불분명한 표현들이 치밀히 의도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호함은 경계를 지우고 거대함으로 변모합니다. 불확실한 언어는 흐릿한 대신 광범위해집니다. 이것이 작가가 일부러 애매하고 알기 힘든 표현을 사용한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나는 어젯밤에요, 그림자에 발이 걸렸어요.
-132p中


'그림자'.

작가는 그 모호함으로 말미암아 가능성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림자'를 선택했습니다. 그 안에는 슬픔도 있고, 허망함도 있고, 나약함도 있고, 외로움도 있고, 공허함도 있고, ……


그러니까 황 정은 작가는 아주 커다란 이야기를 쓰려 했던 것입니다. 간단히 슬픔에 관한 이야기라고, 혹은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쉽게 단순화될 수 없는, 광범위한 이야기를요.

우리들 각자의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말입니다.


'百' 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일백(100)이라는 수의 개념도 있지만 여러, 모두, 모든, 온갖… 의 의미 또한 포함된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百의 그림자' 라는 말은, 수많은 그림자들, 모든 그림자들, 온갖 그림자들……, 다시 말해 모든 우리들 각자의 그림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百' 이라는 말이, 왜 이 이야기가 광범위한 이야기인지를 설명합니다.

어째서 이 짧은 소설이 그토록 거대한 영역을 품을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림자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종종 앞이 깜깜해지기도 합니다.


은교 씨, 뭘 그렇게 걱정하나요, 너무 어두워서요, 밤이니까 어둡죠, 그게 아니고요, 너무 어두워서, 정말로 밝은 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요, 말은 안 되는데요 무재 씨, 자꾸자꾸 드네요, 그런 생각이, …
-163p中


누구에게나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사방이 너무도 깜깜해서 우리는 쉽게 두려워지곤 하는 것인데, 작중 '은교' 라는 인물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 어두워서 정말로 밝은 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림자'의 한 단면입니다.


작품의 주된 배경이 도심의 한 쇠락해가는 전자상가라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잖아요.
다 어디로 갔을까요.
-112p中


사라져가는 상가, 쇠락, 이곳을 더 이상 찾지 않는 사람들, 재개발 사업으로 상인들은 쫓겨나고, 그 중에는 딸들을 유학 보내고 혼자서 일하는 아버지도 있는데……, 여긴 다들 그런 사람들 뿐이므로 딱히 유별날 일도 없다는 듯, ……, 몇몇 죽음들, 흔해진 불행과 흔해진 폭력, 전자상가의 철거, 슬럼 ……

이것이 바로 '그림자'의 한 단면입니다.


인물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노래할까요.

무재 씨가 말했다.

은교 씨는 무슨 노래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수 없어요.

칠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수 없어요.

왜요.

콩밭, 에서 목이 메서요.

-73~74p中


그리고,


노래할까요.

해주세요.

무슨 노래 할까요.

구두 발자국.

은교 씨, 그건 뭔가요.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강아지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누가, 누가 새벽에 떠나갔나…….

안 되겠어요.

왜요?

목이 메서요.

-92p中


목이 메어서, 노래부르지 못한다는 사람.

이것 역시 '그림자'의 한 단면입니다.






그러나 <百의 그림자>가 이러한 '그림자'의 모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 중반에 등장하는 '오무사' 이야기가 그림자의 짙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 있어요. (…)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

-94~95p中


이것은 숱한 그림자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홀로 빛나는 전구의 이미지입니다.


오무사 이야기가 삽입되면서, 독자들은 희망을 보게 됩니다. 그림자들 사이에서 '정말로 밝은 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두려워하는 찰나, 이 때 등장하는 오무사의 전구는 의심과 두려움을 불식시키는 데 효과적으로 일조합니다. 불빛이 언제나 그림자를 이기니까요.


<百의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 깜빡, 깜빡, 빛나는 비상등을 연상시키는 플롯으로 짜여 있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러다 비상등이 켜지는 순간 어둠은 사라지고 따뜻한 빛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비상등이 꺼지면 다시 어두워지고, 다시 불이 들어오면 밝아지고, 다시 어두워지고, 또 밝아지고…….

이 소설은 그렇게 진행됩니다.

비상등이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지며……. 오무사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전구의 이미지는 그렇게 소설 속 그림자의 이미지와 대치하며 빛과 어둠의 균형을 이룹니다.


그래서 결국엔,


차라리 노래할게요.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목에 멘다고 해 놓고,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하고 무재 씨는 마무리까지 노래했다.
한 번 더, 라고 해도 못 하겠다고는 하지 않고 하얀 눈 위에, 라면서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95~96p中


-노래합니다.

목이 멘다며, 너무 슬퍼서 도저히 못하겠다던 인물들이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아주 작은 빛이라 하더라도, 불빛이 언제나 그림자를 이기니까요.

그림자가 빛을 받아 점점 희어집니다. 어둠이 희박해집니다.






이제 결말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빛과 어둠의 이미지가 극대화되어 나타납니다.

두 사람은 어둠 속을 걸어갑니다. 하지만 그곳에 비상등이, 점점이 이어지는 가로등이 있습니다.


세 개의 가로등이 또 다른 모퉁이를 향해 점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
어둠에 잠겼다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하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168p中


아마도 작가 황 정은이 바라보는 삶이란 이런 모습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것, 그러나 비상등처럼, 깜빡거리는 불빛이 점점이 존재하는 것.

세계는 여전히 난폭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몇 있으므로, 작가의 말마따나,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밤길에 간 두 사람이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한다
-172p, 작가의 말中


…… 라는 말로써 우리가 <百의 그림자>를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둘이 함께 걷는다면,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을 것입니다. 어둠이 그리 어둡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이 <'白'의 그림자>였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이렇게 해서 한 편의 따뜻한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읽고 나면 배 안쪽 어딘가가 따뜻해지는.


나는 이렇게 차가운 음식 말고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어요, 국물이요, 먹으면 배가 따뜻해지는, 따끈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이 있는 것을, 듬뿍 먹고 싶거든요,……
-147p中


작중 은교의 말대로, <百의 그림자>가 제공하는 것은 따뜻함인 것 같습니다. 따끈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 같은 것.

소설 내내 등장하는 '일어선 그림자를 따라가선 안 된다' 는 말은, 우리 마음 속 그림자에게 지지 말라는 얘기처럼 들립니다. 시스템이 아무리 부조리하고 가혹하더라도, 세상이 아무리 난폭하게 굴더라도, 절대 그림자에 지지 말자는, 따뜻한 응원 같습니다.


죽겠다.

어느 순간 이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작품 속 무재의 대사를 꼭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마요."



응원, 그림자에 지지 말자는 응원입니다.

그러니 같은 말을 한 번만 더 반복해도 좋다면, <百의 그림자>를 두고 이렇게 쓰겠습니다.


-꼭 이런 소설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말을 건네줄 소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참 반갑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노래할까요.
-169p中, 마지막 문장





0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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