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평연습 Oct 31. 2021

시인의 감수성으로 발견된 전쟁터

#13. 열세 번째 책) 문 보영, <배틀그라운드>


<배틀그라운드>에 대한 제 감상,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어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았더니 흡사 전쟁터와 같더라!

열세 번째 책, <배틀그라운드>, 문 보영, 한국, 2019.






낙타의 속눈썹은 너무 길어서
눈을 감을 때마다
빗자루로 세상을 쓰는 것 같았다.
-41p, <겹친 3년·1>中



제가 아는 한, 시인의 역할 중 하나는 언어 혹은 세계를 재해석 하는 일입니다.

이미 알려진 것을 깨뜨리는 일, 그 치명적인 상투성과 싸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거나 구축하는 일, 그것이 아마도 시인에게 주어진 임무일 것입니다.


바로 그런 면에서 시 쓰는 일을, 하나의 발명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우선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에 대해 모를 사람들을 위해, 작가는 시집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놓았습니다.


게임소개

<배틀그라운드>는 원에 관한 게임이다. 한 비행기에 탑승한 플레이어들은 약속된 섬으로 향한다. 섬에 원이 생기는데, 어디에 생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원은 점점 줄어들며, 원 바깥에 있으면 체력이 빨리 바닥나므로 유저들은 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동시에 적과 싸워야 하며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운다. (…)

-13p中


앞서 말했듯이, 시인은 이미 알려진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사람, 또다른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 익숙한 것의 상투성을 해체하는 사람… 입니다. 그런 일들에 능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배틀그라운드>라는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 속에서 이 탁월한 시인이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해 보여 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이 시집을 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을 향해 뛴다. (…) 그들은 뛰어야 한다.
-30p,<원>中


'배틀그라운드' 라는 하나의 작은 전쟁터. 문보영 작가는 이곳을 손쉽게 우리가 사는 세상과 바꿔치기합니다.


'원' 안에 들어가야만 살아남는 게임 속 풍경은 우리 사회의 모습과 날카롭게 닮아 있습니다.

원 밖에 있으면 체력이 점점 바닥나 죽게 되므로, 유저들은 필사적으로 원 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이러한 게임의 모습에 '입시', '취업' 등의 단어를 함께 떠올리는 순간, 이것이 묘하게 현실과 맞아떨어지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시인 문보영이 이야기하는 '전쟁터'가 어디인지를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필요한 건 사람을 만나도 죽지 않는 경험이네
그런 세상을 믿는 자는 게임 참여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네
-51p,<설원맵>中


게임 속 사람들은 모두 적이고,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다른 사람 모두를 죽이는 게 최종 목적입니다.

따라서 화자의 말을 빌리면 <배틀그라운드>란,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오로지 사람뿐인데, 다들 사람 찾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 내가 죽거나 상대가 죽는, 반드시 누군가 한 명은 죽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이 만났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다면, 그런 세상은 <배틀그라운드> 밖에 있습니다. 화자의 말마따나,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는 순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게임 참여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답니다.

말인즉, 세계에서 열외되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타인을 이겨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 냉혹한 체제는 <배틀그라운드> 속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 문보영이 시인의 눈으로 발견한, 현실의 새로운 모습입니다.

모두가 '원'을 향해 뛰며, 이 무언의 바운더리 안에 포함되지 못한 자는 낙오되는 세계, 둘이 만나면 누군가 반드시 죽는 세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저는 이곳을, 한 시인의 감수성이 발견한 전쟁터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유저들에게

손 잡는 기능은 없습니다

침 뱉는 기능

기절하는 기능

그리고 뒤에서 발로 차는 기능이 있습니다

방해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합시다

뒤로 다가가 발로 찹시다

-34p,<송경련이 왕밍밍에 관해 쓴 첫 번째 보고서>中


그런데 이 작품, 주제에 비해 왜 이렇게 가볍게 느껴질까요?


<배틀그라운드>라는 제목만 보자면, 피튀기는 전쟁터, 무시무시한 살육의 현장, 인간의 잔인성과 악함, 무지 혹은 포악함…… 같은 것들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를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시들은 그토록 무겁고 거대한 주제의식을 다루면서도, 그 무게감으로부터 가볍게 탈피할 줄도 압니다. 거의 유쾌하다고 할 만큼의 산뜻한 명랑함으로, 전쟁터라는 이 시집의 배경을 놓고 마치 아이처럼 뛰어다닙니다.


우리의 송경련

바지 지퍼가 열려 있어요

너 이 자식, 세상을 벌컥 열어버리면 어떡해!

왕밍밍은 죽어버린 애인을 흘끗 보고요

언덕을 올라 달아납니다

여느 때처럼 혼잣말인 노래를 부르며

열린 지퍼를 놔두고 뛰었습니다

-121p,<열린 채 뜁니다>中


이 발랄함, 산뜻함, 쾌활함이 소설집 전체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어두운 전쟁터를 밝게 비춥니다, 라고 표현하는 것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거의 뻔뻔스럽기까지 한 허풍선이의 해맑은 명랑함이 거기 있습니다.

시집 사이에 간간이 삽입되어 있는 그림인지, 낙서인지 모를 삽화들도 이런 해맑음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종종 등장하는,


토할 수 없다면 기도하세요!
-79p中


…와 같은 말장난들이나,


그녀가 풀밭에 쓰러졌을 때 거대한 문짝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사람들은 어딘가 보이지 않는 집이 있는 것 같다고 수군거렸고 길치들만이 그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92p中


…와 같은 만담조의 허풍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를 읽는 이는 절대로 진지한 고뇌나 심각한 문제의식 속에 빠질 수 없습니다. 대신 유쾌한 농담만이, 발칙한 상상만이 남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거의 뻔뻔스럽기까지 한, 허풍선이의 해맑은 명랑함이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그런 해맑은 미소로 얼렁뚱땅 상황을 무마해보겠다는 생각이냐, 하고 비난할지도 모르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알면서도 져 주고 싶은,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애교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그런 심정 비슷한 것을 결국엔 모두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문보영은 농담에 성공합니다.


<배틀그라운드>가 유명한 전쟁 게임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유효해지는 것 같습니다. (뭐가 그렇게 진지해, 이건 어차피 게임일 뿐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마치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일 같다고, 시인은 비유와 상징을 동원해 가며 말하지만, 결국엔 그건 다 비유일 뿐이지 않냐고, 실제가 아니라 상징에 불과하지 않냐고, 작가가 오히려 독자에게 되묻는 것입니다.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심각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소설로 치면, 실은 모든 게 다 꿈이었다, 하는 그런 느낌일까요. 문보영은 모든 게 다 게임일 뿐이다, 하면서 쉽게 그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책임감 없는 회피나 도망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시인의 역할은 어쩌면 딱 거기까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배틀그라운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일종의 전쟁터로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시인의 탁월한 감수성으로 빚어진 재기발랄함을 수반하면서, 독자들이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그 맑음과 명랑함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을 발휘하며, 읽는 이를 위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만 같습니다.

따라서 여기 스물 네 편의 시들은 촌철살인의 농담으로도, 적나라한 독설로도, 혹은 티 없이 순수한 장난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이 아름답다면
아름다움은 실수에 가깝습니다
-87p, <일어나는 일이 스스로에 관해 말하다>中



그러고 보면 시가 꼭 아름다움을 노래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배틀그라운드>에서는 시가 아름다움을 비웃습니다.

뻔뻔하게, 허풍을 떨면서!





09.13.21.

instagram : 우리 시대의 책읽기(@toonoisylonelinesss)

naver blog : blog.naver.com/kimhoeyeon

작가의 이전글 읽고 나면 그림자가 희박해진다, '白의 그림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