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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선량한 사람들의 다정한 기도

#22. 스물두 번째 책) 장 류진, <달까지 가자>


장류진 작가는 이번에도, 그녀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그녀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의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참 다정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물두 번째 책, <달까지 가자>, 장 류진, 한국, 2021.






화면 안의 숫자가 커질수록
그걸 들고 있는 우리의 미소도 점점 커져갔다.
-267p中



몇 년 전,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단편집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이 작가는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에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현실의 경험에 대해서 쓰고, 또 쓴다는 행위를 통해 다시 한 번 현실을 경험하면서, 소설을 쓰는 누구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나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둔 채,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소설을 써 냈습니다.


이 작가가 얼마나 그럴듯한 현실을 이야기는지, 이 소설의 내용이 통채로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내 이야기인 것만 같습니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외로움, 즐거움, 그리고 수많은 기쁨과 슬픔들은 우리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독단적인 기쁨, 희소한 슬픔이 아니라 광범위하고 잘 알려진 기쁨과 슬픔들, 다시 말해 다름아닌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기쁨이거나 슬픔인 것입니다.






1) 평범성과 단독성


과거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이 작가가 이루어낸 한 가지 성취가 있다면, 불특정한 다수의 사람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대시켰다는 점일 것입니다. '공감' 이라는 강력한 힘으로 제각기 다른 수많은 사람들 내면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하였다는, '내' 이야기가 '네' 이야기가 되고, 종내에는 '우리' 이야기가 되는, 통일의 미덕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 작가의 그러한 장점은 <달까지 가자>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To the Moon!(121p)" 을 외치며 울고 웃는 은상과 다해의 이야기는 지금 당장 내 주변의 누군가 혹은 나 자신에게 일어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평범하고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비슷하게 겪었던 이야기이거나 앞으로 겪게 될 이야기, 혹은 내 주변 누군가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꼭 내 이야기 같다' 라는 감상은 하나의 유대로 발전하게 됩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는 사실에서, 작가 역시 나와 비슷한 사람이구나를 느낄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작품을 읽는 수많은 타인의 삶 역시 나의 삶과 정말로 닮아 있구나를 체감하면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등장인물-작가-그리고 같은 책을 읽는 수많은 타인들로까지 유대의 범위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가 보편성을 획득했을 때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평범함' 하나만 가지고는 소설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작가의 탁월한 점은 이야기의 평범성을 통해 독자들 개인의 단독성을 지지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지송이는 2억 4,000만원을 벌었다.

나는 3억 2,000만원을 벌었다.

은상 언니는 33억을 벌었다.

내겐 이 모든 게 2017년 5월부터 2018년 1월까지, 단 여덟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298~299p


비트코인과 유사한 이더리움이라는 가상화폐 블록체인 시스템에 투자하여 수백 배의 이익을 보고 최종적으로 3억 2,000만원을 벌게 된 다해는 앞으로 뭘 할까요? 지긋지긋한 회사에서 퇴사도 하고, 그토록 바라던 새집으로 이사도 가고, …….

어쩌면 독자들이 가장 궁금한 점은 주인공이 3억 2,000만원을 벌었다는 그 사실보다는 이제 그 어마어마한 목돈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일 텐데, 작품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끝나 버립니다.

소설의 내용은 그녀가 이더리움을 알게 된 순간부터, 처음에는 조금씩 소극적으로 사들이다가 나중에는 점점 대범하게 큰 돈을 투자하기 시작하더니, 매일매일 주가가 오르고 내리는 것에 울고 웃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희일비하다가, 온갖 마음고생 끝에 결국에는 3억 2,000만원을 벌게 되기까지, 그 모든 기쁨과 슬픔의 나날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돈을 벌었으니, 이제 써야 합니다. 퇴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돈을 벌었으면 '그 이후' 의 이야기가 있어야 할 텐데, 이 작품은 '그 이후' 의 이야기를 열어 둔 채 조용히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앞서 이 소설이 누구에게나 '꼭 내 이야기 같'게 느껴지는 평범성을 가지고 있다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상상할 것입니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만약 3억 2,000만원을 벌었다면? 작품 속 다해나 은상이나 지송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목돈이 내게 생긴다면? 그럼 나는 뭘 할까.

개인의 단독성은 바로 여기에서 실현됩니다. 이 작가는 돈을 벌게 되는 과정은 상세하게 보여주면서도 정작 그 이후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함으로써, 독자들이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로 '그 이후'를 채워 가기를 권합니다.

상황의 보편성 속에 독자들을 참여시키는 대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독자들이 직접 선택하도록 종용하는 것입니다.

평소 제과제빵에 관심이 있는 독자였다면 빵집을 차리게 될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겠고, 작은 빌딩을 사 건물주가 되거나 아니면 어디 먼 나라로 훌쩍 떠나 버리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개개인의 특수함만큼이나 단독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달까지 가자>의 핵심은 어쩌면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 이후'에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평범하고 보편적이라서 쉽게 공감하게 되고 익숙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고 나면 '이야기 이후'에 대해서 독자들이 저마다 단독적인 방식으로 궁리하면서, 수백 수천 가지의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개인의 단독성을 한 이야기의 평범성을 통하여 실현시키는 이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독자들은 장류진 작가의 소설을 통해 그저 우리가 사는 평범한 세상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평범성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단독성을 확인해보고자 함일 것입니다.






2) 치환과 대입의 방법론


같은 맥락에서, 이 작가가 평범성 속에 개인의 단독성을 발견하도록 만들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이야기의 보편성'과도 연관이 있는데, 쉽게 말해서 그녀의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방법론은 누구나 공감하기 쉽도록 쓴다는 점에 있는 듯 보입니다.


-저번에 말한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뭘?

-가상화폐

-참나.

언니의 메시지가 또다시 도착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할 때는 안 한다더니?

-75p


…와 같은 채팅 메세지 부분에서 잘 보여지듯이 이 작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세계를 묘사합니다.

덕분에 그녀가 젊은 세대의 독자에게서 특히나 사랑받는 이유를 발견하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과 우리가 잘 아는 인간관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환경, 그 익숙하고 친숙한 세계가 그녀의 소설의 근간이 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쉽게 소설 속에 자기 자신을 대입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쉽게 자기 자신으로 치환되고,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내 주변의 누군가로 대체됩니다.

이렇듯 치환과 대입의 방법론이, 이 작가의 소설을 이루는 지대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우리들이라고 말입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일의 기쁨과 슬픔> 속 단편들에서도, 그리고 장편 <달까지 가자>에서도, 장류진 작가는 언제나 인물들에게 사려깊게 대해 왔습니다. 인물들은 죽거나 크게 다치지 않고, 작가는 그들을 벼랑 끝까지 내몰거나 완전한 절망에 빠트리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이 작가가 인물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독자들을 바라보는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악기로 비유하자면, 장류진 작가의 소설은 맑고 경쾌하게 울리는 실로폰 같습니다. 기쁨들 사이에 간혹 슬픔이 있겠지만, 즐거움 사이에 간혹 외로움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가볍고 상쾌합니다.

때문에 이 작품 속의 '달까지 가자!' 는 은상과 다해의 기도가 몇몇 독자들에게는 애뜻한 응원처럼 들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치 그 기도가 나를 위한 기도인 것처럼 말입니다.


저 역시 그런 독자 중 하나였으므로, 이 다정한 소설을 읽으며 왠지 고맙다고 생각했습니다.





10.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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