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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Nov 03. 2021

꿈을 글로 쓴다고 해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23. 스물세 번째 책) 조 해진,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아무도 본 적 없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해도 꿈은 반드시 거기에 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의심해왔다면, 당신에게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이 하나의 근거가 되어줄 수 있겠습니다.

스물세 번째 책, <아무도 보지 못한 숲>, 조 해진, 한국, 2013.






웃었다.
-163p, 마지막 문장



첫째로, 이 소설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이란 이를테면 잃어버린 동생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곳,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웃을 수 있는 곳,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아무도 상처 주지 않는 곳, 사람이 상하지 않는 곳…… 일 텐데, 그런 곳은 전설 속의 동물처럼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현실은 실로 거대한 부조리와 고난의 총체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약하며 언제나 고통받는다는, 어둡고 비정한 의식이 이 소설의 전반에 걸쳐져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은 그러한 비정함으로부터 태어나 그 비정함을 또 한 번 의식하면서 쓰인 소설이고,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우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무도 슬픈 소설입니다.


둘째로, 이 소설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꿀 수 있다는 작가의 믿음이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더라도, 혹은 영원히 갈 수 없더라도, 소설에서만큼은 적어도 꿈꿔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세계의 비정함에 대한 작가의 반문을 읽게 됩니다. 영원히 가지 못할 곳이더라도 꿈꿀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꿈이 현실이 될 수 없다 해도 그 꿈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작가는 이와 같은 말로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그렇게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따라서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은 꿈으로부터 태어나 그 꿈으로 읽는 이를 위로하는 소설이고, 절망보다는 희망에 가까우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참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셋째로, 이 소설에 대한 위의 두 표현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까닭은 아름다운 슬픔이나 고통스러운 위안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이 풍기는 아름다움은 동시에 비정하고, 이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언제나 고통스럽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 소설을 두고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 작품은 '둘 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를 모두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의 윤리적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무지와 균형 -윤리


앞서 이야기했듯, 이 작가의 감수성이 진정 탁월한 것은 슬픔을 슬프게만 그리지 않고 아름다움을 아름답게만 그리지 않았다는 데 있는 듯합니다.

비정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그리고 고통과 위안 사이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이 작가의 균형감각을 두고 '윤리적인 균형감각'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세상이 흑과 백만으로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으며 개인이 한눈에 꿰뚫어보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곳이라는, 일종의 무지의 감각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완전한 선도 아니고 완전한 악도 아니며, 이곳에서는 완전한 행복도 완전한 불행도 없습니다. 흑과 백 사이의 무한한 회색이 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고 본다면,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회색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이러한 무지 속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잘못하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검게 보이면 흑이 되고, 대충 희어 보이면 백이 되는 이분법의 폭력이 도처에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소설을 통해 그러한 이분법과 싸우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작가가 보여주는 사려깊은 균형잡기가, 슬픔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아닌 그 사이의 무수한 회색 중의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2. 모자이크 처리 -환상


이제 이 작가가 어떻게 무지 속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녀의 소설에서 절망이 어떻게 희망과 섞여 회색이 되는지, 다음의 이 부분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버그나 몬스터의 배역 따위 없는 곳, 갚아야 할 빚도 없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하는 기억도 없는 곳, 칼이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도 없는 곳, 사람이 상하지 않는 곳, 사라지거나 위장되는 자도 없는 곳, 그런 곳. 숲이라면 좋을 듯했다. 호수가 있는 숲.
-131p


아무도 보지 못한, 아무도 가지 못할 이 숲은, 말하자면 선량함의 숲이자 절망은 없고 희망만 있는 곳, 상처는 없고 사랑만 있는 곳, 꿈 속의 어딘가입니다.

작가는 소설 속에 이 새하얀 세계를 설정해놓고 그것을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이라 명명합니다. 인물들은 마치 꿈 속으로 들어가듯이 이 세계에 들어가며 이 숲은 하나의 환상이 됩니다.


소년은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투명한 문들이 나올 때면 언젠가 M이 그랬던 것처럼 수긋이 고개를 숙여 그 문들을 통과했다. 곧 숲의 입구가 나왔다. (…) 새들의 지저귐이 한 번씩 들려올 때면 소년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나무 위 어딘가를 올려다보곤 했다.
드디어 호수가 나타났다.
-160p


환상 속으로 걸어들어간 인물들이 아름답고 선량한 세상을 만났을 때, 환상의 너머는 어두컴컴한 실제 세상에 비해 눈부시게 하얀 색일 것입니다. '갚아야 할 빚도 없'고, '칼이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도 없'으며 '사람이 상하지 않는' 이 환상 속의 숲은 현실이라는 흑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백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숲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곳은 아무도 보지 못한 곳, 환상이라는 투명한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숲이므로 표현하자면 존재하면서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를 생각하자면 모자이크 처리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상처도 불안도 절망도 없는 선량함의 숲은 현실 세계에서 모자이크처럼, 희미하고 흐릿하게, 그리고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이 작가가 환상이라는 장치를 동원한 의도를 바로 이 점에서 추측해볼 수 있겠습니다. 환상이라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병치된 흑과 백은 바로 그 환상성을 등에 업고 절묘하게 섞이며 희미하고 흐릿하며 모호한 회색빛을 띄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작가는 세계의 모든 흰 것들-아마도 희망과 연대와 위안과 … 사랑 같은 것들을 한데 모아 '숲'으로 창조하였고, 이것을 환상이라는 방법론으로 모자이크처리하여 주변의 모든 검은 것들-아마도 증오와 상처와 고통 같은 것들과 효과적으로 섞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이 작가가 해낸 중요한 성취, 다시 한 번 말하면 흑과 백 사이 무수한 회색들의 무지 사이에서 윤리적인 균형잡기가 가능했던 방법이 아니었을까, 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갚아야 할 빛도 없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하는 기억도 없는 곳,
칼이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도 없는 곳,
사람이 상하지 않는 곳,
그런 곳.
숲이라면 좋을 듯했다.
-131p



간절하게 가고 싶은 곳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영원히 가지 못할 곳일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은 하나의 지극한 위안으로 읽힙니다. 아무도 본 적 없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해도 꿈은 반드시 거기에 있다는, 그리고 꿈이 현실이 될 수 없다 해도 그 꿈이 있으니 언제까지나 괜찮을 거라는, 비정하지만 아름답고 고통스럽지만 위안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위안이 이 작가가 글을 쓰도록 추동하는 힘인 듯 보입니다. 꿈을 글로 쓴다고 해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온통 어둡고 검게만 보일 때, 이 글을 읽은 우리는 '아무도 보지 못한 숲'을 조용히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이 회색빛의 소설이 모두에게 그런 숲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11.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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