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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Nov 05. 2021

슬픔을 감당하는 글쓰기

#24. 스물네 번째 책) 조 해진, <환한 숨>


도저히 감당할 길 없는 압도적인 슬픔을 두고 우리가 어찌할 바를 몰라 차라리 외면하기를 택했을 때,

이 작가는 글쓰기를 택했습니다.

이 책은 슬픔에 갖추는 하나의 예의입니다.

스물네 번째 책, <환한 숨>, 조 해진, 한국, 2021.






환부나 증상 없이 나는 투병했다.
아무도 모르게……
-47p, <흩어지는 구름> 中



기억은 남겨진 자들의 몫입니다.

<환한 숨> 속 인물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를 기억할 의무가 있다는 단호한 책임감이 이 작가의 어깨 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글쓰기를 통해 비극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언제까지나 붙들겠다는 의지가 이 작가의 손끝에 있습니다. 또, 모두의 비극을 일일이 아우르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는 부채감이 이 작가의 심장에 있습니다.

여기 아홉 편의 소설들은 그렇게 쓰였습니다. 그녀의 심장 속 내밀한 부채감으로부터 태어나 어깨 위의 무거운 책임감과 손끝의 줄기찬 의지로 완성되어 우리 앞에 놓였습니다.


그녀의 말은 모두가 공평하게 비정하다면 한 사람의 비정은 모두의 비정으로 희석된다고, 세상 어디에도 더 비정한 비정은 없다고, 그렇게 번역되어 들렸다.
-98p, <하나의 숨> 中


이 아홉 편의 소설들에게 작가가 맡긴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의 비극을 모두의 비극으로 만들라는, 그렇게 한 사람 혹은 한 시절의 비극을 공평하게 희석시키라는, 공평함과 균형에 관한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연결이라도 되어 있듯, 한 사람의 비참이 나의 불행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듯, 그녀는 세상 모든 비극에 대해 경건하게 기도하고 예의를 갖추려 합니다. 한 사람의 숨결 속에 포함되어 있는 무수한 상처와 슬픔들이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지거나 잊히기 전에, 기억하려 합니다, 글쓰기로 온전히 담아내려 합니다, 타인의 비극을 제힘으로 감당하려 합니다.


우리는 <환한 숨>에서 이러한 이 작가의 윤리적인 감수성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삶만큼이나 타인과 타인의 삶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녀의 소설을 두고 '타자의 소설'이라고 칭한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 참으로 공감됩니다.

여기 아홉 편의 글을 읽는 동안 어디가 끝인지도 모른 채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라앉음'이 실은 타인의 삶에 스며드는 과정이었음을, 이 책을 다 읽고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환한 숨>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소설들을 차례로 돌아보겠습니다.






1. <환한 나무 꼭대기>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장 강한 인상의 이미지가 이 작품 속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 작가의 글을 몇 편 읽으며, 그녀가 이미지로 글을 쓴다는 인상을 받은 바 있는데, 이를테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 풍경은 내게 죽음의 이미지가 됐다."(<흩어지는 구름>中), "그때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던 모욕감은 눈송이 같은 입자의 형태를 띠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하나의 숨> 中), "평택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어머니의 번호를 찾는 동안, 택시 차창에는 그 여름의 망상해변 풍경이 흘러갔을지도 모르겠다."(<하나의 숨> 中) 와 같은 문장들에서처럼, 있는 사실을 묘사하기보다 상상을 묘사하는 부분, 머릿속에 구름처럼 떠오르는 상상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부분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가 어떤 이미지냐 하면, -대부분의 그녀의 소설에서- 이것은 압도적인 슬픔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어쩔 수가 없는, 도저히 손쓸 방도가 없는 그런 종류의 슬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환한 나무 꼭대기>에서 탈영병을 바라보는 강희의 시선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슬픔의 이미지, 비극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의 심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해서 그만큼의 깊은 여운이 남습니다.

아홉 작품 중 첫 번째로 실린 작품답게, 조해진 작가의 문학세계로 들어가는 데 대단히 적절한 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 <흩어지는 구름>


"당신은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누구도 그 이상을 해낼 수 없었을 거라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는 말"(69p)을 건네는 따뜻한 작품입니다. 그녀의 위로가 더욱 우리에게 와닿는 까닭은 죽기 위해 우스 산 정상에 올라간 인물이 위의 말을 떠올리고 죽음 대신 삶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과 호재, 다큐멘터리 속 왕년의 선장, 우스 로프웨이의 직원.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에서 동일한 비정을 발견하고 이를 하나의 비의로 엮어내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비의를 위로하는 이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어김없이 발휘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45p


그러므로, 그녀가 구사하는 문장들을 '위로의 언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3. <하나의 숨>


작품의 핵심은 '하나'가 겪게 되는 비극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비극이 그녀의 담임선생이었던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 비극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극 그 이후에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소설은 비극의 탐구가 아니라 비극을 대하는 태도의 탐구입니다. 이것은 이 작품 <하나의 숨>뿐만 아니라 조해진 작가의 거의 모든 소설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지만 특히나 이 작품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의 숨이 내가 들이켜는 숨과 섞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두려웠다. (…)
내가 그 숨을 들이켜면서 하나 대신 일하고 돈 벌며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는 비참한 생각……
-101p


그녀의 부채의식은 하나의 비극을 자신의 비극으로 확대시키며 하나의 숨과 자신의 숨이 섞이는 이미지로까지 연결됩니다.

어쩌면 자신이 하나의 비극을 막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단순한 자책감과는 약간 다릅니다. 이는 하나의 비극에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삶으로 체화함으로써 최대한의 존중을 보이는 것. 아마도 다친 하나에게 무심하게 위로금을 보내고 외부인 출입증이 없으니 들어갈 수 없다며 하나 어머님을 문전 박대하는 회사에는 결코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하나의 비극에 대한 예의일 테니, 이 작가가 보여 주려 했던 것은 한 사람의 비극에 대해 사려 깊게 예의를 갖추는 태도일 것입니다.






4. <경계선 사이로>


이것은 이분법에 관한 소설입니다. 경계는 폭력이 되고 폭력은 반드시 비극을 낳습니다.

이 작품 속에는 여러 가지 이분법이 등장하는데, 조계사 앞에 모인 개혁파와 안정파 스님들, 파업 시위 때 해고된 선배 기자들과 이 덕분에 채용된 후배 기자들과 같은 어떤 경계를 사이에 두고 갈라진 두 집단들뿐만 아니라, 계절과 계절, 국경, 시차와 같은 단어들 역시 눈에 띄게 등장합니다. 이런 이분법의 세상에서 '윤희'의 이미지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선 사이에, 이분법을 거절하고 묵묵히 맞서며 존재합니다.


기자실 책상으로 돌아온 연진은 공항의 보편적인 풍경에 윤희를 대입해 보았다. 출국장 벤치든 공항 안의 커피숍 테라스든, 윤희는 공항 어디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게 잘 녹아들었다. 공항에서 파생되는 여러 이미지에도 그녀는 꽤 잘 어울렸다.
-116~117p


작가는 세계의 이분법과 맞서기 위한 한 방법으로 '윤희'를 창조해낸 것입니다.

계절이 경계선을 넘어설 때마다, 즉 환절기 때마다 '감기약이나 아스피린으로 치료할 수 없'(108p)는 무기력한 증상과 싸워야 하는 연진의 모습은, 이러한 이분법에 상처를 입는 개인의 모습과 오버랩됩니다. 작품 속에서 윤희는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공항의 출국장에 있습니다. 계절의 경계 사이에서, 국가의 경계 사이를 넘나드는 '경계선 사이로'의 이미지는 평화롭고 아름답게 느껴질 뿐 아니라 당당하게 여겨집니다.






5. <파종하는 밤>


도무지 어쩔 방도가 없는 일을 제힘으로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쩔쩔매며 몸부림치는 한 인물의 기록입니다. 슬픈 소설입니다. 그런데 이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바로 그들을 지켜보는 일에서, 그들을 기억하는 일에서 옵니다.


산 자의 기억은 죽은 자의 유일한 특권이기 때문에, 그것이 위안이 맞으며 절실하게 필요하다고도.
-159p


'고통스러운 위안'(165p)을 받으며 그녀는 자신의 일을 계속합니다. 타자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직면하려 하고,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거기에서 오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 모든 비극에 대한 예의일 것이기 때문에.






6. <눈 속의 사람>


마찬가지로, '비극의 기억'이라는 이 작가의 핵심적인 테마가 이 작품에서도 한 번 더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래 문장들을 보면, 그 테마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욱 전면에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객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숨이 막혀왔다. 잊고 있던 한 사람의 터무니없는 비극을 되새기는 것은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178p
게다가 거의 완전히 잊힌 그 전쟁을 나만은 기억하며 살게 될 거라는 예감은 끔찍하기만 했다.
-198~199p


타인의 비극을 자신의 삶에 들여온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신경 쓰지 않거나 잊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로서 그녀는, 그리고 그녀가 창조한 인물들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작가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사실 우리 모두에게 타인의 비극을 기억할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고, 그녀가 <눈 속의 사람>을 통해 항의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 기억 때문에 괴로워할지라도, 그녀는 계속할 것입니다. 그녀의 글쓰기가 그 슬픔을 감당할 것입니다.






7. <높고 느린 용서>


한 번 더 이분법에 관해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이 짧은 소설은 그 일반적인 이분법을 깨뜨리면서 무한히 깊어지고 또 넓어집니다. 단순한 성폭력의 가해자/피해자 구도는 사건이 일어난 후 많은 세월이 흘러 단순한 선과 악, 피해와 보상, 범죄와 처벌 개념으로는 나누기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다시 한번 그 경계 사이를 허무는 기묘한 개념, 바로 '용서'가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자문 위원으로 있는 여성 단체에 회의차 참석했는데, 그 건물 계단참에서 무심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흘러가는 구름을 보게 되었습니다. 구름은 높은 곳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이동 중이었습니다. 그제야 오랜 장마가 끝났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귀하, 어딘가에서 저의 용서도 그런 모양으로 오고 있지 않을까요?
-221p


이 짧은 소설이 '용서'라는 단어의 그 무한한 깊이를 재발견하게 한다는 점이 실로 놀랍습니다. 화자는 용서란 '높고 느린 구름'처럼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며 고백하는데, 아마도 그러한 구름의 불가해하고 질박한 이미지, 그리고 무엇보다 인위적으로는 강제할 수 없다는 순수한 자연스러움의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고는 '용서'를 표현하기 힘들었나 봅니다. 아름답습니다.






8. <숨결보다 뜨거운>


타인의 삶이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아름다울 풍경일까요 아니면 비극적인 풍경일까요. 그 순간을 포착한 조해진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녀가 타인과 타인의 삶을 얼마나 갸륵하게 여기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과 타자의 삶이 숨결처럼 겹쳐질 때, 글쓰기가 얼마나 훌륭한 매개체가 될 수 있는지도요…….


작품 속 다음의 문장은 이 소설뿐만 아니라 그녀의 소설 세계 전체를 대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시를 다 쓰고 나서도 기차에 남아 있던 그 한 사람을 종종 생각하곤 했다. 아니, 그 사람의 숨결이었을까.
-261p






9. <문래>


마지막으로 실린 이 작품이 앞선 여덟 편의 작품과 무엇이 다르냐 하면, 다른 작품들이 타인에게 향하는 이 작가의 시선이었다면, 이 작품은 유일하게 오롯이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이라는 점에서입니다.


내 고향은 문래라고, 나의 문장(文)이 그곳에서 왔다(來)고……
-291p


자신의 고향이 '문래'이며 자신의 문장이 그곳으로부터 왔다(文來)는 화자의 말을 끝으로, <환한 숨>이라는 아홉 절로 된 장시가 마무리됩니다.

앞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자신의 삶 안에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해박하게 묘사한 그 일관적인 진행에서 어떻게 보면 약간 벗어나 있는지도 모르지만 <문래>는 오히려 앞의 여덟 작품을 통째로 아우르는 무엇이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아마 이 작품이 작가 자신의 글쓰기에 관한 고백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단편집을 읽고서, 이렇게 단언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가의 글은 타인으로부터 온다'고 말입니다. 그녀 글쓰기의 원천은 세상 모든 타자이고, 특히 그 타자의 비극이나 슬픔으로부터 온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그녀가 말하는 '문래'란, 아마도 세상의 모든 타자들과 그들의 상처입은 삶을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환한 숨>이라는 하나의 긴 장편소설을 읽었습니다.

여기 아홉 편의 단편은 다 읽고 나면 마치 하나로 연결된 듯, 이 책이 단 한 편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모든 작품 속을 관통하는 하나의 의지를 우리가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의지란, 비극을 기억하겠다는 의지이고,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지이고, 책임과 감당에의 의지이고, 타인의 삶과 고통에 예의를 갖추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녀가 이러한 지극한 의지로 써 놓은 글들을 우리가 끝내 다 읽어 냈다면, 이 독서가 우리에게 타인의 슬픔을 감당하는 경험을 제공할 것입니다.





1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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