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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Nov 12. 2021

오래되어 물러터진 복숭아의 일대기

#25. 스물다섯 번째 책) 구 병모, <파과>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에는 낡고 병들고 바래질 텐데,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그 낡아감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그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게 옳은 일이지 않을까, 라고

<파과>를 읽으며 생각해보았습니다.

스물다섯 번째 책, <파과>, 구 병모, 한국, 2018.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342p



이야기는 주인공 '조각'의 일대기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이 일대기라는 것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일대기이자 모든 상실에 대한 일대기이고, 바로 이 점 때문에 평범한 일대기가 아닙니다.

'조각'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는 진행보다는 단절에, 영원보다는 사라짐에, 성취보다는 상실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습니다. 그녀의 일대기는,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에는 변질되고 부식되며 그러다 종내에는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한 채 쓰였습니다. 심지어는 '조각'이라는 인물의 삶 자체가 그녀가 겪어온, 그리고 앞으로 겪어갈 무수한 상실로서 정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파과>는 잠깐 반짝이다 사라질 불꽃의 일대기이고, 탐스럽게 열린 과일이 언제까지나 싱싱하지 못하듯이, 결국 반드시 시들고 마는 세상 모든 상실에게 바치는 하나의 찬사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하는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라는 문장은 마치 이 소설 전체를 압축하여 만든 단 하나의 문장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문장을 읽고 나면 상실을 받아들이고, 상실과 함께 살아가고, 더 나아가 상실을 사랑하겠다는 '조각'의 각오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라진다'는 것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라는 마지막 문장을 향해 달려가는 이 소설에는, 단 한 번도 '파과'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파과'가 의미하는 부식과 낡음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품도 단종되고.
고장. 단종.
이제 그만 좀 버리세요.
이거 더 이상 못 버틴다니까.
교체.
-224p


낡은 냉장고가 '고장'나고 부품도 '단종'되어 이제 '더 이상 못 버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주인공 조각은 냉장고를 '교체'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괜찮다며 견딜 만하다고 말합니다.

'고장', '단종', '교체'와 같은 단어들이 꼭 사물에만 붙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예순 살이 넘도록 청부살인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조각의 처지 역시 이 냉장고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몸도 예전같지 않고 군데군데 고장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이제는 은퇴하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지만, 여전히 녹슨 몸을 이끌고 '방역'이라 불리는, 쉽게 말해 사람 죽이는 일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거기 뭉크러져 죽이 되기 직전인 갈색의, 원래는 복숭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세 덩어리 보인다. 집에 와서 그녀는 꼭 한 개를 먹었을 뿐이고, 그 뒤로 잊어버린 모양이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
-225p


오래되어 물러터진 복숭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해서 시큼한 시취를 풍기며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 들어가게 될 이 복숭아, 아니 '복숭아였던 것'은 이제 갈색의 곰팡이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읽는 독자들은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것이 이 복숭아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은 사라진 '류', 앞으로 사라질 '조각', 그리고 살아 있거나 살아 있지 않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이 복숭아처럼 '파과'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부식되고 변질될 것입니다. 낡거나 늙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의 삶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실'을 수없이 많이 목도하고 경험합니다. 어쩌면 하나의 상실과 또다른 상실이 쌓여 지금의 삶을 이루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상실되었거나 앞으로 상실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삶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상실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튼튼하게 설계된 냉장고에도,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탐스러운 과일에도, 사람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는 무자비한 킬러(방역업자)에게도, 조금의 예외도 없이 성립됩니다. '상실'은 하나의 법칙처럼, 하나의 진리처럼 이 세계 전체를 아우릅니다.






상실이 어떤 방법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 힘으로 절대로 막을 수 없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상실이란, 마치 어떤 운명이나 신탁처럼 우리 앞에 '주어진' 것이라면, 그 상실을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상실은 피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감당해내야 하는 것,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몫은 바로 그 상실을 이를 악물고 '살아내는' 일일 것입니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상실을 살아야 할 때.
-342p


<파과>에서 그려내는 '상실'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에 대한 힌트가 이 마지막 문단에 있습니다. '상실'의 연대기를 써낸 이 작가의 작업은 위의 인용된 문단으로서 최종적으로 완성됩니다.

'조각'의 손톱 위에 그려진 불꽃놀이들, 다양한 색과 도형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그림이 결국에는 2주 정도가 지나면 사라질 거라는 그 짧은 시간의 반짝임이 도리어 그 손톱 위의 작품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라고 강변하는 화자의 말에서,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상실'을 대할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각은 이제 정말로 늙었고, 다시는 방역 일을 하지 못할 것이며, 한쪽 손을 잃었고, 언젠가 조용히 그녀가 키우는 개 '무용'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점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 갖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문장이 '상실'을 순진하게 미화한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미화야말로 '상실'이 불러올 수 있는 총체적인 무력감에 대항하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때의 미화는 어찌보면 '윤리적인 미화'입니다. 삶이라는 상실 앞에 무기력하게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갈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덕분에 이 마지막 장면은 억지스럽지 않고, 상투성에서 탈피하며, 실은 거의 당연하게까지 여겨집니다.

따라서 작품 속의 문장대로, 인간도, 사물도, 삶도 모두 사라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빛나는 것들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작가의 윤리적인 미화를 기꺼이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파과>라는, 상실과 낡음을 향한 찬사를 읽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업으로 삼던 인물이 누군가의 생을 위해 투쟁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그 최초의 '생을 위한 투쟁'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이 작품은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을 통해 '상실'은 윤리적으로 미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화를 통해 누군가는 수많은 상실을 딛고 살아갈 힘을 얻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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