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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Nov 19. 2021

기쁨과 슬픔으로 이루어지는 연대

#26. 스물여섯 번째 책) 장 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쉽게 쓰기, 친절하게 설명하기, 읽기 좋게 꼭꼭 씹어 말하기…….

'장류진 스타일'의 시작입니다. 담백하고 명랑한 세계가 이 책 속에 있습니다.

스물여섯 번째 책, <일의 기쁨과 슬픔>, 장 류진, 한국, 2019.






사실 회사에서 울어본 적이 있다
-58p, <일의 기쁨과 슬픔> 中



이 책에 대해 쓰기 전에 이미 장류진 작가의 최근작인 <달까지 가자>에 대해 썼던 바 있습니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단순히 작품의 길이가 다를 뿐이 아니라 많은 점에서 명백하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장편소설에서는 체력이 중요합니다. 길고 무거운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나갈 힘이, 캐릭터의 매력이나 주제의 충분한 무게 같은 것들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장편은 도중에 힘을 잃고 맙니다. 그에 비하면 단편은 체력보다는 번뜩이는 상상력이 중요합니다. 짧고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강렬한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단순히 작가가 써낸 작품의 길이가 어느 정도냐 하는 것으로 쉽게 구분하곤 하는 것이지만 실은 어떤 작품이 장편에 적합한지 단편에 적합한지는 그 이야기 자체가 결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는 서사적인 면에서 보나 캐릭터적인 면에서 보나 분명 장편에 걸맞은 스케일이었고, 그녀의 첫 단행본인 <일의 기쁨과 슬픔>은 단편에 훨씬 잘 어울리는 이야기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들을 두 가지 표현으로 압축하면, 강렬하고도 정확하다고 말하겠습니다. 첫째로 단편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그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강렬'하고, 둘째로 그 상상력이 갑자기 떠오른 어떤 영감으로부터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아주 예리한 시선에서 온다는 점에서 '정확'합니다. 여덟 개의 작품들 속 강렬하고 정확한 기쁨과 슬픔들을 돌아보며 이 책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강렬한 현실)


이전에 스물두 번째 책 <달까지 가자> 리뷰에서, 장류진 작가의 문학세계에 '현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현실의 경험에 대해서 쓰고, 또 쓴다는 행위를 통해 다시 한번 현실을 경험하면서, 소설을 쓰는 누구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나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둔 채,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소설을 써 냈습니다.

이 작가가 얼마나 그럴듯한 현실을 이야기는지, 이 소설의 내용이 통째로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내 이야기인 것만 같습니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외로움, 즐거움, 그리고 수많은 기쁨과 슬픔들은 우리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독단적인 기쁨, 희소한 슬픔이 아니라 광범위하고 잘 알려진 기쁨과 슬픔들, 다시 말해 다름 아닌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기쁨이거나 슬픔인 것입니다.

-이전 글 #22 <달까지 가자> 에서


확실히 '현실'은 그녀가 소설을 쓰는 데에 있어 대체할 수 없는 시작점이자 종결점인듯 보입니다. 그녀의 소설에서 '현실'이란, <잘 살겠습니다>에서 "언니랑 내 사이는 축의금 오만원 정도의 사이였다."(23p) 와 같이, 직장 동료의 결혼식 축의금 봉투에 만 원짜리 지폐를 몇 장 넣을지를 수십 번 고민해야 하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직장인의 고민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그렇게 좋은 거면 앞으로 일년 동안 이차장은 월급, 포인트로 받게"(50p) 와 같이, 터무니없고 황당한 직장 상사의 엽기 행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무심코 찍어 올린 자작곡이 갑자기 크게 유행을 타며 유명해지게 된 한 무명 싱어송라이터나(<다소 낮음>), 가사도우미를 불러 일을 시키지만 늘 찜찜한 마음을 없앨 수가 없는 신혼부부(<도움의 손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녀의 소설을 읽는 일이 즐거운 까닭은, 그녀의 소설이 그리고 있는 이러한 현실이 하나같이 쉽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함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20~30대의 청년이 바라보는 현실을, 특히 직장 생활 속에서의 지리멸렬하고 지지부진한 현실을 그려내면서 그 흔한 진부함 속으로 빠지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 놀랄 만한 점입니다. 그녀가 포착하는 현실은 우리가 다 아는 현실이지만 뻔하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틀에 박힌 모습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월급을 포인트로 받게 된 '거북이알'이 포인트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중고시장 사이트를 점령하게 된 이야기에서처럼, 쉽게 잊기 힘든 강렬함을 선사합니다.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나 <새벽의 방문자들>에서, 자신이 사는 집을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오피스텔로 착각한 남자들의 방문을 맞게 된 주인공의 모습은 현실과 너무나 밀접하게 맞닿아 있으면서도 독자들에게 강한 충격을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감은 이 작품을 마치 스릴러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현실에 너무도 만연한 스릴러입니다.


오피스텔의 형광등은 한 번에 켜지지 않고 서너 번 깜빡인 뒤에 완전히 켜졌다. 최초로 깜빡이는 순간, 온 방은 마치 점박이 무늬 벽지를 바른 듯, 바퀴벌레로 가득 차 있다. 두 번째 깜빡일 때는, 참깨를 쏟아놓은 것처럼 온 바닥에 수천 마리가 깔렸다. 세 번째에는 백 마리. 그 다음 열 마리. 그리고 마침내 불이 다 켜지면, 아무것도 없었다.
-169p, <새벽의 방문자들>中


그녀가 그려내는 '강렬한 현실'은 일상에서 출발하지만 끝내 그 일상을 뛰어넘으면서 특별한 순간으로 독자들을 데려갑니다. 작가 장류진이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이 우리에게 그토록 생생하게 여겨지는 첫 번째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그녀의 소설 속 현실은 실제 현실을 닮았으나, 그보다 강합니다.






2. 정확한 현실)


두 번째로 장류진의 현실을 표현할 방법으로 '정확하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찾아낸 '강렬한 현실'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생각해 보았을 때, 아마도 불현듯 떠오른 미지의 영감으로부터라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상으로부터 온다는 말이 훨씬 적절해 보입니다.

그녀는 현실을 아주 예리하게 바라보고,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 역시 정확하게 자신과 세상을 인식할 줄 압니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
-28p, <잘 살아보겠습니다>中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그 정확성으로 말미암아 그녀가 그려내는 현실은 다시 한번 '현실성'을 얻습니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겠다는 위 화자의 말이 어쩐지 우리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화자의 말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독자들에게 정확히 알려 주겠다는, 작가의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녀의 정확한 시선이 현실에 닿으면, 현실은 무섭도록 선명해집니다. 현실을 순진하고 단순하게 착각하는 인물들이 바로 그 착각으로부터 배신당하는 이야기를 담아낸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상대가 자신과 자고 싶어 할 거라는 '지훈'의 착각이나, 길가에서 쪼그리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할머니를 보고 당연히 구걸하고 있는 거지일 거라고 생각해 버린 '지유'의 착각은,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뜨거운 여름날 출근길에서, 2,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두고 자신의 연봉과 공과금과 관리비와 보험금과 휴대폰 요금과 할부금을 끊임없이 계산하며 마실까 말까를 수십 번 고민해야 하는 신입사원(<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의 모습은 반대로 자신의 현실을 너무나 정확하게 인식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녀가 소설 속에 그려내는 인물들이 그녀가 인식하는 현실의 정확성과 결부되면서 그녀의 이야기는 어떤 특수한 환상이 아니라 분명한 우리 세계의 현실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작가 장류진이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이 우리에게 그토록 생생하게 여겨지는 두 번째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그녀의 소설은 아주 날카로운 주삿바늘처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현실을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3. 현실을 통한 연대)


장류진 작가의 소설에는 첫째로는 '강렬한 현실'이 있고, 둘째로는 '정확한 현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장류진 스타일', '장류진의 현실'은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이 소설집을 통해 완성도 높게 집약되었습니다.

이 작품집에서 그녀가 이루어낸 한 가지 성취가 있다면, 불특정한 다수의 사람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대시켰다는 점일 것입니다. 공감이라는 강력한 힘으로 제각기 다른 수많은 사람들 내면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하였다는, '내' 이야기가 '네' 이야기가 되고, 종내에는 '우리' 이야기가 되는, 통일의 미덕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녀가 창조한 강렬하고 정확한 현실은 우리를 알게 모르게 연대시킵니다. 독자들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서로 연대하고 인물과 인물도 서로 연대하며, 독자들과 인물들도 연대합니다. 좋은 소설의 덕목이란 어쩌면 이러한 긍정적인 연대의 가능성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와, 그리고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과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모두 같은 '기쁨과 슬픔'들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면, '다름 아닌 우리의 기쁨과 슬픔들이 여기에 있다' 라고 말한다면, 그 한 문장으로 장류진 작가의 소설 세계를 압축할 수도 있겠습니다.





1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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