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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Nov 24. 2021

작가 정세랑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27. 스물일곱 번째 책) 정 세랑, <시선으로부터,>


이 책을 읽는 일은 거듭되는 세대교체의 흐름 속에서도 교체되지 않는 하나의 뿌리를 발견하는 일이자, 우리가 그 뿌리로부터 뻗어나왔음을 다시 한번 자각하는 일입니다.

'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동체는 없다'는 그녀의 말처럼 말입니다.

정세랑 작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소설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스물일곱 번째 책, <시선으로부터,>, 정 세랑, 한국, 2020.






우린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낼 거야.
-11p



세대교체. 소설을 읽으며 이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과거와 현재, 신과 구,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을 날렵하게 오가면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세대교체의 현장을 아주 따뜻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하와이의 날씨만큼이나) 따뜻한 시선으로, 정세랑 작가는 <시선으로부터,>를 통해 세대와 세대 사이의 따스한 연결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이 하와이에서 지내는 아주 특별하고 즐거운 제사는, 현재가 과거를 기억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소재이자 과거가 현재를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소재입니다. '기억'과 '보호'라는 두 가지 작용으로 멀고도 가까운 두 세대가 연결되는 모습은, 분명 이 작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비극과 희망이 오가며, 아픔과 위안이 교차하는 이 작품에서 작가 정세랑이 이들을 어떻게 연결시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우리의 '심시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녀가 이 복잡한 가계의 뿌리이자 중심입니다. 그리고 '시선'이라는 뿌리, 그 중심이 지탱하는 것은 이 작품 속 무려 열댓 명에 달하는 인물(시선의 자녀)들이고 그들은 말하자면 '시선에게서 뻗어나온 가지'(323p)들입니다.

이 장대한 가계 혹은 계보가 '심시선'이라는 여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명준'을 제외하면 모두 딸이고, "우리집은 모계 사회"(274p)라고 말하며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를 여성 중심의 서사로 읽히도록 만듭니다.


그러니까 <시선으로부터,>는 첫째로, 구세대가 기성세대와 신세대로 이어지는 순차적이면서 유구한 세대교체의 흐름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둘째로, 그 흐름의 중심에 여성을 놓음으로써 여성의 역사에 조금 더 무게를 기울였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 역사에의 기억)


종종 21세기가 20세기로부터 태어났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기도 합니다.


모든 일이 너무 반복된다는 생각 들지 않아?
-143p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어도 여전히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 과거의 비극과, 과거의 투쟁과, 과거의 아픔들……. 우리는 이것을 '역사'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그 유명한 명제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시선이 겪은 비극은 두 세대를 걸쳐 '화수'에게도 반복됩니다. 두 인물 사이에는 적어도 약 오십 년의 시차가 있을 것인데, 마티아스가 던진 칼에 맞았던 시선의 비극과 익명의 한 남성으로부터 염산을 맞은 화수의 비극 사이에는 너무나 닮은 점이 많습니다. 과거의 비극은 언제든 현재에 와서 다시 반복될 수 있고, 전 세대가 겪었던 아픔은 형태를 약간만 바꾼 채로 현 세대가 겪을 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비극은 세대교체의 흐름 속에서도 계속 살아남아 반복된다는 사실을, 또 위에서 말했듯이 이 작가는 특히나 여성이 겪었던 비극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할 이유와도 관련 있습니다.


"낳지 않아."
화수가 결국 말해버렸다. 잠시 말들이 뚝 그쳤다.
"……사람이 사람에게 염산을 던지는 세계에 살러 오라고 할 수 없어요. 도저히."
-321p


화수는 자신은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며 '사람이 사람에게 염산을 던지는 세계'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이 세계는 '사람이 사람에게 염산을 던지는 세계'로 요약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할머니 심시선에게 이 세계는 '사람이 사람에게 유화 나이프를 던지는 세계'이거나 '사람이 사람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악의를 품는 세계'로 보였을 것입니다. 약 오십 년이 지났어도 이 세계의 어두운 모습은 너무나 닮았습니다.



작중 시선의 자녀들은 십 주기를 맞아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합니다. 이 제사가 우리가 알던 제사와 다르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하와이라는 이색적인 장소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사를 지내게 되는 열두 명의 인물들은 각자 자신과 시선에게 의미있는 물건들을 시선이 오랜 시간 살았던 하와이 각지에서 찾아와 제사상에 올리기로 합니다. 일반적인 제사와는 사뭇 다른, 예를 들어 경아가 가져온 특별한 원두로 내린 완벽한 한 잔의 커피라던가, 해림이 가져온 하와이 외래종 새들의 깃털 컬렉션, 지수가 가져온 무지개 사진들 등등이 제사상 위를 채웁니다. 우윤은 서핑을 배우며 자신이 처음으로 탄 파도의 거품을 제사상에 올리고, 첫째 명혜는 하와이에서 배운 훌라 댄스를 추는 것으로 제 몫을 채우기도 합니다. 제사상 위에는 각종 전이나 과일 대신, 하와이의 화산석 자갈팬케이크, 하와이 특산 말라사다 도넛 같은 것들이 채워집니다.

이것은 '시선'을, 혹은 시대의 과거를 인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하는 일입니다.


이 작가는 '제사'라는 전통, 그 오래된 관습 위에 신세대적인 발상을 올려놓았습니다. 지금 시대에 제사는 더이상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고 심지어는 없어져야 할 관습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도 지난 10년간 시선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물론 그것은 죽기 전 시선의 부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0주기를 맞아 이들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하와이 제사'를 치르게 된 데에는 분명 과거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화수는 멈추고 끊겨 전달되지 않을 것들을 헤아려보았다. 어릴 때 엄마들이 머리를 묶어주던 여러 방식, 변형된 자장가들, 절판된 그림책들, 배앓이를 할 때의 민간요법, 카나페 레시피들, 냉동실의 미니 눈사람 (…)
-323~324p


화수는 이 세계를 '사람이 사람에게 염산을 던지는 곳'이라 말했습니다. 그것은 시선의 세대에서부터 줄곧 반복되어왔던 비극이었고, 역사는 기억하지 않으면 그렇게 비극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일러 줍니다.

아마도 이 소설이 내는 목소리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 라거나 '제사는 꼭 필요한 것이다' 가 아니라,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시선으로부터,>의 인물들은 '시선'을 추모하면서, 과거를 되새기면서, 역사를 기억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멈추고 끊겨 전달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과거의 비극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21세기는 20세기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20세기를 살아낸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는 작가의 말대로,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듯이, 기억하지 않고 나아가는 공동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2. 역사의 보호)


위에서 인용한 324페이지의 문장 뒤에 생략된 부분을 다시 옮겨보겠습니다.


화수는 멈추고 끊겨 전달되지 않을 것들을 헤아려보았다. 어릴 때 엄마들이 머리를 묶어주던 여러 방식, 변형된 자장가들, 절판된 그림책들, 배앓이를 할 때의 민간요법, 카나페 레시피들, 냉동실의 미니 눈사람 (…) 변색된 병풍, 마흔 살짜리 화분, 우표 부분이 다 뜯겨나간 편지들, 홀수로 남은 잔들……
"그렇지만 상실감도 물려주지 않을 수 있겠네."
-323~324p


세대교체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사라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화자의 말대로 '어릴 때 엄마들이 머리를 묶어주던 여러 방식'이나 '배앓이를 할 때의 민간요법' 같은 것들은 '멈추고 끊겨 전달되지 않을 것'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것이 왠지 안타깝게 느껴지는 까닭은 모든 좋은 것들을 뒷세대에 물려주고 싶은 윗세대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렇지만 상실감도 물려주지 않을 수 있겠네." 라는 말로 "그건 그것대로 좋겠다"(324p)고 안심하는 화수의 마음이란, 모든 나쁜 것들을 뒷세대에 물려주지 않고 싶은 윗세대의 마음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세대가 겪는 비극이나 아픔을 우리의 자녀들 세대가 또다시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 20세기의 신여성이었던 심시선이 그토록 열심히 세상과 투쟁한 데에는 아마도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마음 말입니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331p


이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의 과거가 현재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 역사가, 그리고 20세기를 살아낸 사람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선으로부터,>를 크게 두 가지 테마로 읽어 보았습니다. '기억'과 '보호' 라는 상호작용이 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인 듯 느껴졌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유명한 말을 <시선으로부터,>에 대입시켜 보면, '기억'이란 현재가 과거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고 '보호'란 과거가 현재에게 대답하는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가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는 현재를 보호합니다. 이것이 <시선으로부터,>가 이야기하는 '역사'라는 대화이고,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대화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이 사람에게 염산을 던지는 세계'나 '사람이 사람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악의를 품는 세계'는 사라질 거라고, 이 소설을 읽으며 그렇게 믿고 싶어졌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단에는 온 가족이 하와이로 '제사 여행'을 다녀온 뒤로 그들 마음속에 "무언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331p)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아마 인물들은 기억을 통해 과거를 체험한 뒤로, 과거의 보호를 느끼게 된 뒤로, 각자 조금씩은 자신의 삶과 지금의 세상에 변화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분명 자신의 인물들이 겪은 변화를 독자들도 겪길 바라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 책을 읽는 일은 거듭되는 세대교체의 흐름 속에서도 교체되지 않는 하나의 뿌리를 발견하는 일이자, 우리가 그 뿌리로부터 뻗어나왔음을 다시 한번 자각하는 일입니다.

이런 소설이, 우리 시대의 한 '젊은' 작가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에 기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나는 이제 그만 말해야겠습니다.
내게 오는 말할 기회를 이제 젊은 사람에게 주십시오.
-326p





11.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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