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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Dec 08. 2021

그래도 산다는 것은 분명 선(善)이다.

#28. 스물여덟 번째 책) 한 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저녁'이라는 시간으로 환유된 삶의 모든 비정함을 이 시인은, 자신의 서랍 속에 넣고 마치 가두어 버리듯 닫아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아무리 삶이 녹록지 않는다 해도 살자고 외칩니다.

일단 지금은, 지금을 살자고 외칩니다.

스물여덟 번째 책,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 강, 한국, 2013.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146p, <유월> 中



한 강 작가의 작품을 자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녀가 언제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글을 써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삶'은 일반적인 의미의 삶이라기보다는, '살아감' 혹은 '살아 있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일곱 번째 책으로 다루었던 그녀의 소설 <흰>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발견했던 바 있듯이,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흰>, 128p中)과 같은 지극한 기도의 언어들이 지금껏 그녀의 작품을 구성해왔고, 그 간절한 삶으로의 의지(살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문학 세계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주제의식이라고 보입니다.

그 '기도의 언어'를 달리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과 타인의 삶을 위해 문장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가까이에서보다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인간과 세상을 한눈에 조명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기도입니다. '넌 할 수 있다', '잘될 거다'와 같이 당장 체감되는 차원의 위로가 아닙니다. 그녀의 위로는 차라리 '그래도 살자, 죽지 말고 살자'에 더 가깝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시집인 이 작품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가 늘 해왔던, 그리고 앞으로 해 나갈 '삶' 이야기의 일부로 보입니다. 이번에도 한 강 작가는 꿋꿋하게 '살자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치 어떠한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오직 산다는 것만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선(善)인 양 말입니다.






1.


살겠다는 의지는 시적으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그녀는 밥을 먹겠다는 말로 이를 대신합니다. 아래가 이 시집의 첫 시입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13p, <어느 늦은 저녁 나는>中


살아간다는 일은 너무나 많은 것들과 만났다가 작별하는 일이고, 시간이 흐르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과 사물과 감정들은 '영원히 지나가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에서 '상실'이라는 말로 자주 다루어졌던 것이고, 이 화자도 그러한 '상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으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갑자기 명확하게 인식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 화자의 경우에는 그 순간이 '밥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던 때 찾아옵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그 찰나의 감각, 고통스러운 인식의 감각을 화자도 느낀 것입니다. 그렇게 뼈아픈 상실의 감각이 찾아오는 시간을, 이 시인은 '저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화자가 그 '저녁'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상실을 감각한 뒤, 화자는 한 행을 띄우고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밥을 먹어야지"

실은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삶에의 의지, 살겠다는 다짐은 밥을 먹겠다는 말로써 효과적으로 함축됩니다.

그녀에게 밥을 먹겠다는 말은 곧 살겠다는, 살아 보겠다는 말이고, 삶이 끊임없는 상실로 채워진다 해도 꿋꿋이 견디어 살아가겠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삶에의 의지를 새로운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인데, '밥을 먹겠다'라는 표현 외에도 이 시집에는 같은 의미의 메시지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말하고 있는 모습이 종종 보입니다.


죽음이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

아니,
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거야, (…)

-28p, <저녁의 대화>中


위 시에서 자신은 결코 '삼켜지지 않'을 것이며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것'이라는 화자의 말도 결국엔 '밥을 먹어야지'와 같은 말입니다. '살겠다'라는 말입니다.

'운명'이라는 말은 145p<서시>에서 또다시 등장하는데,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 에서처럼, 화자는 운명을 거부하고 이겨내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운명을 '조용히 끌어안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저녁의 대화>에서도 운명을 극복하겠다는 말을 하는 대신,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겠다고 말하는 것에서 화자가 자신의 운명(아마도 죽음)을 부정하기보다는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언젠가 때가 되어 운명처럼 죽음이 찾아오면, 그것을 거부할 방법은 없겠지만, 적어도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 것이고, 계속 살아갈 것이라는, 이 시인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삼켜지지 않을 것'이라는, 화자의 굳은 다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살아라, 살아서/살아 있음을 말하라"(<유월>, 147p)라고 말한 것이, 정말로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2.


이 시인이 건너온 '저녁'이란, 어떤 시간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녁이란, 낮이 밤으로 가는 시간이고, 해가 지고 그림자가 덮치는 시간이고, 밤이 검어지는 시간이자 운명이 찾아오는 시간, 죽음과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그녀에게 저녁이란, 그녀가 가장 약해지는 시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연약해지는 시간. 죽는다는 게 그리 별거인가, 하며 인간으로서는 가장 나약한 상념에 빠지는 시간 말입니다.

저녁만 되면, 그녀는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46p, <해부극장 2>中


내가 참을 수 없이 미워지고 살아 있다는 사실마저 견디기 힘들어지는 순간, 그녀는 상상 속에서 육체를 '해부'하며 살아 있음을 느끼고, 그 감각으로 괴로워합니다. 그녀의 약해진 마음은 담 밑에서 발견한 하얀 돌을 보고 "좋겠다 너는,/생명이 없어서"(<조용한 날들>, 40p)라고 말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차라리 생명이 없는 것을 부러워하는 비참. 모두 그녀에게 '저녁'이 찾아왔을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따라서 그녀가 이 시집에 붙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제목을 문장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감에 방해가 되는 나약한 마음들을 서랍 안에 넣고 가둬버리겠다는 뜻은 아닐까. 자신이 나약해지는 시간, 더 확대하자면 삶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저녁'이라는 단어로 한데 묶고 그것을 서랍 안에 가두어 두겠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저녁'을 '서랍에 넣어' 두겠다는 다짐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그리고 그 의지를 흔들리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빠짐없이 모아 서랍 안에 가둬 놓겠다는 선언의 일종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선언은 생의 선언이자 삶의 선언일 텐데, 바로 이 점이 그녀의 시가 풍기는 전반적인 비극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를 희망의 시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마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할 어떤 경계가 존재할 것입니다. 이 작가가 말하는 '저녁' 또한 낮과 밤 사이 하나의 경계라는 점에서 이와 같습니다. 저는 이 시인이, 저녁을 통과하는 일이 삶과 죽음을 통과하는 일과 어쩌면 비슷하리라고 생각했을 것만 같습니다.






3.


이렇게 그녀가 건너온 '저녁'을 읽었습니다. 이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면 시를 읽은 우리들도 그녀와 함께 어떤 경계를 건너온 셈입니다. 저녁이라 불리는 경계를 말입니다.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151p, <저녁의 소묘 5>中


이 시집의 마지막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이를 보고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살아냈고, 살아서, 살아 있음을 이야기한다는 걸 말입니다.





1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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