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평연습 Dec 21. 2021

아가미(에)의 보살핌

#31. 서른한 번째 책) 구 병모, <아가미>


'아가미'는 영원한 보살핌의 대상도 아니고, 절대적인 보살핌의 주체도 아닙니다. 둘 다입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보살핌은, 아가미'의' 보살핌이기도 하고, 반대로 아가미'에의' 보살핌이기도 합니다.

서른한 번째 책, <아가미>, 구 병모, 한국, 2011.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 없는 물이기도 하고.
-22p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읽었다. 우선 호수가 있다. 이런 경우 늘 그렇듯 시체가 자주 발견되곤 하는, 꺼림칙하고 원인 모를 두려움을 느끼게 하며 심지어는 어딘가 주술적이기까지 한, 그런 호수다. 그리고 그 호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이('곤')이 있다. '기적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와 함께 호수에 빠진 그 아이가 귀 뒤에 아가미를 단 채로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설정은 이렇고, 소설의 스토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렇게 요약해도 좋을까. 이것은 아가미를 가진 소년이 아가미가 없는 소년에게 받았던 사랑과 보살핌을, 이제는 그 아가미가 없는 다른 이들을 위해 다시 베푼다는 이야기다. 요컨대 이 소설의 핵심은 '보살핌의 이동'에 있다. 보살핌의 대상이던 '아가미 소년'이 그 보살핌 덕분에 살아남아 이제는 타자들을 향한 보살핌의 주체가 된다는 것. 그러나 이 소설을 '은혜 갚는 까치' 모티프의 일종으로 읽어도 좋은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행하는 보살핌의 층위는 '보은'이 아니라 '봉사'에 가까우므로. 다시 말해 이 소설은 대가 없는 사랑이란 가능한가, 하고 조심스럽게 묻는 소설이고, 또 동시에 그렇다, 고 자답하는 소설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다. 어떻게 사람에게 아가미가 있을 수 있느냐, 혹은 어떻게 사람 피부가 물고기 비늘이 될 수 있느냐는, 소설의 세부 사항을 두고 투정 부리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느낀 가장 이상한 점은, 바로 인물들의 행동이다.

우리의 아가미 소년 '곤'은 알 수 없는 어떤 마법적인 힘으로 아가미를 달고서 살아남았고, 할아버지와 단둘이 호수 근처에 살던 아가미 없는 소년 '강하'는 그를 집으로 데려와 몸을 덥히고 음식을 준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자는 할아버지를 만류하고 '곤'이 제 집에서 살게 한다. 수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한 가족으로 살게 되고, '강하'는 '곤'의 아가미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숨겨 준다. 엄밀히 말하면 '곤'을 살려낸 것은 아가미가 아니라 '강하'다. 이것이 첫 번째 이상한 점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강하가 죽은 뒤, 세상을 등지고 투명 인간처럼 살아가는 곤이 하는 일이라곤 이제 단 두 가지뿐이다. 간혹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사람을 살리는 일, 그리고 물속 어딘가에 있을 강하의 시체를 찾는 일. 이것이 두 번째 이상한 점이다.

이 외에도 이상한 점은 많지만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다. 이 둘은 하나의 공통점으로 연결되는데, 바로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하고, 또 어쩌면 "왜?"라고 묻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컨대 강하는 '왜' 곤을 살려 냈고 그가 자신의 집에서 살아가기를 허락했는가? 또, '왜' 곤은 물에 빠지는 사람들을 살리려 하는가?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있고 수요와 공급이 있으며, 동기와 소산으로 이 세계가 구성된다는, '논리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엉터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어느 지면에서도 이 인물들의 행동을 보여줄 뿐이지, 그 행동의 근거를 설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강하가 곤을 살리는 데에는 어떠한 이유도 없다. 곤이 물에 빠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도 마찬가지. 여기에는 "왜?"에 대한 대답이 없다.

그런데 대답이 필요한가? "날 죽이고 싶지 않아?"(185p) 묻는 곤에게 강하가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185p


자신이 죽이고 싶지 않냐고, 왜 자신을 살렸느냐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는 일은, 어쩌면 '대답하지 않는 대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냥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이 대답은 여전히 논리적으로 이상한 대답이다. 하지만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대답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대답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사람을 살리는 일에 논리적인 '근거'가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하기 위해 사람을 살린다', '~때문에 사람을 살린다', 이런 문장은 없고, 또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곧, '~이 없는(아닌) 사람은 살리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로 쉽게 뒤집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근거가 없다. 따라서 논리적인 '이상함'이 되려 이 소설의 무기가 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인물들이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대답하지 않는 것이고, 그전에 "왜?"라고 물어보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아가미> 속 인물들은 '이상'하지만 '옳다'. 논리의 관점에서 결코 설명되지 않을 어떤 윤리적인 감각, 을 이 인물들은 공유한다. 그렇게 사람을 살린다.






그런 행동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곤을 살린 강하의 행동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곤의 행동뿐 아니라, 아주 넓은 범위에서 '살린다'의 의미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행동들. 예컨대 곤이 호수 밑바닥에서 주워 온 '보석 펜던트가 박힌 금목걸이'를 약물로 괴로워하는 강하의 엄마에게 선물하는 행동(149p)이라던가, 혼자 민박에 묶으러 온 손님이 어쩐지 자살할 것만 같아서 밤을 새워 긴장하고 카운터를 지키는 곤의 행동(60p) 같은 것들을. 가능하다면 이 모두를 '보살핌'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이 소설에서 '보살핌'은 '이동'한다. 시간 순서대로 써 보면, 그 보살핌이란 우선 강하의 할아버지로부터 출발하여(부모로부터 버려진 강하를 보살핀다), 강하로 이어지고(곤을 보살핀다), 곤으로 완결되는(물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살핀다)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이 흐름에서 곤은, 보살핌의 절대적 객체에서 주체로 변화한다. 보살핌을 수용하던 자가 어쩌면 그 경험을 토대로 이제는 보살핌을 제공하는 자의 위치로 변화하는 것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보살핌'이 작은 수준에서 큰 수준으로, 그리고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커지고 확대된다는 점이다. 처음에 할아버지와 강하가 보여 주는 보살핌은 오롯이 한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지만, 이후 곤이 수많은 타자를 대상으로 베푸는 보살핌은 이제 그 범위를 무한정으로 넓혀 나가는 것에 해당한다. 관점을 바꾸어 말하면, <아가미>의 몇몇 인물들을 통과하면서 '보살핌'이 점점 몸집을 키우고 확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물들 사이의 이러한 관계가 단순하게 도움을 주고받는 양상과는 사뭇 다르게 펼쳐진다는 점이 내겐 인상 깊다. 이들의 관계는 이른바 '은혜-보은'의 관계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행은 '보은'의 형태로 결코 돌려받지 못할 것고, 그들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는 강하와 할아버지의 사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강하는 곤을 살려냈고 또 키워냈는데 정작 그와 그의 할아버지가 재앙에 가까운 홍수에 휩쓸려 물속에서 생사를 넘나들게 되는 그 순간에, 곤의 아가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곤은 그들이 그렇게 사라졌다는(죽었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전해 들을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어디에도 곤의 배은망덕을 지적하는 부분은, 혹은 그 비슷한 감정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보은'은 없다. 말인즉 <아가미>가 어떤 선행과 그 보답을 통한 일종의 도덕적인 교훈을 제공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대신 <아가미> 속 인물들은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라고 말할 뿐이다. 이들이 조금의 보상 심리도 없이 행하는 보살핌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지극히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봉사'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그 점을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왜 '아가미'인가. 아가미 달린 소년이 아니라 뿔 달린 소년이거나 꼬리 달린 소년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는 '아가미'의 이유를 '호흡'과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아가미란 물속에서 호흡하기에 적절한 것이지 육지에서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아가미 소년이 숨쉬기에 적합한 곳은 오로지 물속이라는 이(異) 세계이며 육지 위, 다시 말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세계에서 그는, 이른바 '호흡 곤란'을 겪어 왔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고, 소설을 읽어 보면 그 추측은 사실이 된다. 우리가 사는 평범한 세계를 평범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미지의 영역인 물속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편안한 세계일 수 있다.

앞서 이 소설을 아가미를 가진 소년이 아가미가 없는 소년에게 받았던 사랑과 보살핌을, 이제는 그 아가미가 없는 다른 이들을 위해 다시 베푼다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고 썼는데, 이번에는 이 문장에서 '아가미를 가진'과 '아가미가 없는'의 대비에 주목해 보면 어떨까. 그들은 세계를 다르게 인식하는 사람이거나 관용적인 의미에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일 것이다. 아가미가 없는 강하가 육지에 살고, 아가미가 있는 곤이 물속에 살듯이. 그들은 다르고, 그 다름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보살핌의 대상'이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이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즉 아가미의 유무로 결정되는, 세계를 호흡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 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보살핌을 토대로 다른 세계의 어려움을 살아 낸다.

'아가미'란 그런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다름'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은 '보살핌'을 의미하는 말도 된다. 이때 그것은 영원한 보살핌의 대상도 아니고, 절대적인 보살핌의 주체도 아니다. 둘 다이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보살핌은, 아가미'의' 보살핌이기도 하고, 반대로 아가미'에의' 보살핌이기도 하다.





12.21.21.

instagram : 우리 시대의 책읽기(@toonoisylonelinesss)

naver blog : blog.naver.com/kimhoeyeon

작가의 이전글 구분 짓지 않는 윤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