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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Dec 25. 2021

비관적이 아니라 비극적일 것.

#32. 서른두 번째 책) 임 성순, <극해>


소설 <극해>는 극한의 악을 다루면서도 비극에 젖을지언정 비관에 빠지지는 않는, 미묘한 균형을 잡아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악이란 무엇인가?'보다는, '선이란 무엇인가?'에 차라리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서른두 번째 책, <극해>, 임 성순, 한국, 2014.






약자를 잡아먹는 것은 죄가 아니잖아요.
-298p



이 한 문장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까마득할 만큼 끔찍한 작품이다. 이 소설이 끔찍하다는 게 아니고 끔찍한 환경에서 끔찍하게 변해버린, 원래는 평범했던 사람들의 변화가, 혹은 그 변화의 불가항력이 끔찍했다.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까, 혹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는 무엇일까. 아마 <극해>를 쓴 임성순 작가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십, 수백 번은 던져 본 사람 같다. 인간이 그야말로 짐승이 될 때, 존엄성이란 단어가 휴지조각처럼 찢겨 버려질 때. <극해>가 포착하는 순간은 바로 그런 순간이고, 이 소설에는 낭만도 낙관도 없다. 현실과 비참만이, 이 소설의 유일한 관심사다.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제목이다. '극해'란 북극이나 남극의 바다를 뜻한다는 게 국어사전의 간단한 설명이다. 하지만 이 국어사전은 극해를 모른다. 거기서 살아 보지 않았으므로. 이 소설 속 인물들처럼, 극해의 한가운데에 맨몸으로 던져져 보았던 사람들만이, 그리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겠다는 악에 받친 생존의 열망을 느껴 본 사람들만이, -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극해'를 안다. 이를테면 극해의 칼바람을 맞아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잘라낸 사람이라던가, 마실 물이 없어 오줌을 받아 마셔 본 사람이라던가……. 이 인물들만이 진정한 '극해'가 무엇인지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북극이나 남극의 바다'를 의미하는 것이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설명이다.

소설 <극해>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른바 '극해'로 상징되는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이 모든 도덕적, 사회적 가치판단을 멈추고 존엄을 잃은 채 타락하는 과정. 사실 이조차도 길다. 더 짧게 말하면, 소설 <극해>는, 인간이 괴물이 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렇게 해서 이 작품의 제목 '극해'가 탄생했다. 뭐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도 될 일이지만 나는 이 작품의 제목이 될 수 있었던 여러 가능성들 중에 하필이면 '극해'가 선정된 이유가 궁금했고, 그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궁리했다. 인간이 한 마리 괴물로 변이하는, 이른바 '타락의 서사'가 이 작품의 본질이라면, '극해'란 그 원인이 되는 '환경'에 해당할 것이다. 극한의 환경, 그 지옥 같은 열악함에서 괴물은 탄생한다. 그런데 그 환경이 이 작품의 제목이 되었다는 것은, 이 작가가 인간이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보다도, 인간을 괴물로 만든(혹은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에 더욱 무게를 두고자 했음은 아닐까. 다시 말해, 이 작품에서 정말로 악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때리고 가두고 살해하는 '유키마루' 선의 선원들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극해'라는 환경이라고, 이 작가는 제목을 통해 묵시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은 괴물이 되었으나 원래는 평범했던, 유키마루 선의 수많은 선원들을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 아니라, 극해라는 거대한 지옥 앞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 말고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던 어떤 불가항력의 피해자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이 괴물들을 연민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작가 역시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용서나 이해의 차원으로 받아들일 문제는 아니다. 내가 바라보는 시각은, 이를테면 인식의 차원이다. 말하자면 이 작가가 인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는 것. 인간을 이해하는 오래된 논쟁 중에 하나는, 이른바 성선설과 성악설로 대표되는, '악'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두 가지의 대비되는 형태로 제시되어 왔다. 전자의 경우 악이란 개발되거나 획득하는 것으로, 후자의 경우에는 타고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극해>는 어떠한가? <극해>에서 인간과 악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둘 중 하나를 고르면 전자에 가까울 것이다. 이 작가가 묘사하는 악은 개발되거나 획득된 악이다. 작품에서 유키마루 선원들의 '원래 모습'이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들은 타고난 악의 존재들이 아니고, 따라서 그들이 행하는 악은 근원적이고 필연적인 악이 아니라, 만들어졌거나 '발생한' 악이다. 그리고 그 발생의 원인이 바로 '극해'이다.

따라서 <극해>라는 제목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이 작가가 악의 극한을 전면적으로 다루면서도, 인간 존재에 무조건적인 회의를 보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작은 희망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을까.






앞서 썼던 대로, 이 소설에는 낭만도 낙관도 없으며 현실과 비참만이 이 작품의 유일한 관심사다. 이제 와서 이 말을 뒤집을 생각은 없다. 여전히 낭만과 낙관과는 무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극해'라는 제목을 돌아 보면, 이 소설이 비극적인 소설인 것은 확실하지만 비관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는다. 비극과 비관은 다른 것이고, 결정적인 차이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온다. 비극을 대하는 태도가 그것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투쟁하고 싸우는 일이라면, 비관의 태도란 절망, 좌절, 그리고 체념일 것이다. 비극이 악의 존재 때문에 일어난다면, 비관은 선의 부재 때문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극해>를 읽고 나서 우리가 던져야 할 한 가지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선이란 무엇인가."





12.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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