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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Dec 27. 2021

조해진의 소설들이 가르쳐 주는 것들.

#33. 서른세 번째 책) 조 해진, <빛의 호위>


여기 가슴 아픈 아홉 편의 소설들이 말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타인의 아픔'입니다.

오직 그 한 가지를 알기 위해 이 아홉 편의 소설을 읽었고

앞으로도 계속 조해진의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서른세 번째 책, <빛의 호위>, 조 해진, 한국, 2017.






나의 신념은
개인이 세계에 앞선다는 것,
이것이다.
-100p, <동쪽 伯의 숲> 中



뒤늦게 조해진 작가의 작품들을 찾아 읽고 있다. 이번에 읽은 것은 그녀가 2013년도부터 2016년도 사이에 쓴, 아름다운 아홉 편의 단편소설을 묶어낸 <빛의 호위>다. 여기 실린 소설들은 누가 읽더라도 작가 조해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다름 아닌 조해진의 소설이라는, 조금 힘주어 말해도 좋다면 오직 조해진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라는, 일종의 신뢰에 가까운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조해진의 소설'이란 무엇이며, '오직 조해진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란 대체 어떤 소설인가. 이전에 다른 글에서, 그녀가 어떤 소설을 쓰는지에 대해 그녀의 최근작인 <환한 숨>을 읽고 이야기해 본 바 있다.* 17년의 <빛의 호위>에서 21년의 <환한 숨>으로. 나는 이번에 <빛의 호위>를 읽으면서 그녀가 수년 전부터 일관된 이야기를 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늘 같은 목소리를 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의 그 '같은 목소리'란, 단순히 <빛의 호위>에서 시작되어 <환한 숨>으로 이어진다기보다는, 조해진 문학의 시작과 끝에, 말하자면 그녀가 소설을 대하는 태도이자 소설에게 바라는 가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글에서는 소설집 <빛의 호위>를 토대로, 조해진의 소설에 대한 두 가지 의문에 답해보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 "왜 그녀의 소설들은 다 비슷하게 느껴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왜 그녀의 소설들은 읽기가 어려울까?". 이렇게 두 가지다. 이 두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우선은 작가 조해진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또 그것이 당연히 이 일의 목적이겠지만, 그 외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를테면 위 질문들에 대답하는 일은, 우리가 왜 문학을 읽는지를 설명하는 일과도 연관 있어 보인다.





*참고 https://brunch.co.kr/@kimhoeyeon/26






1. 왜 그녀의 소설들은 다 비슷하게 느껴질까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왜 조해진의 소설들은 소위 '티가 나는' 걸까. 이를 좋게 말하면 '조해진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다', 가 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 '그녀의 소설은 다 비슷비슷하다.' 따라서 조해진의 소설들이 상투적이고 자기 복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따위의 말로 폄훼되지 않도록, 이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하는 일이 꼭 필요해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그녀의 소설들이 다 비슷하게 보이는 이유,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하나의 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문학 인생 전체를 걸고 이야기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선 소설가로서 조해진은 문학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 여기에 대답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미 여러 작품에서 그녀는 화자의 입을 통해, 혹은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온 바 있다. 수십 가지 예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빛의 호위>에서만 몇 가지를 골라 옮겨 보겠다.


사람을 찍어야죠. 그녀가 대답했다. 전쟁의 비극은 철로 된 무기나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죽은 연인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젊은 여성의 젖은 눈동자 같은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당신이나 나만큼만 울었을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 그 자체니까.
-13p, <빛의 호위>中
나는 생존자고, 생존자는 희생자를 기억해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다.
-18p, <빛의 호위>中
… 그녀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더할 나위 없이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아픈 건 없다고, 살아 있는 한 그 모든 아픔은 위로받고 치유되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속삭이듯이.
-22p, <빛의 호위>中


이를 아주 단순하게 키워드로만 줄여 보자. 조해진의 문학 세계를 요약할 몇 가지 단어를 고른다면(골라야 한다면), 다음과 같다. 순서대로, '사람', '비극', '기억', '윤리'.


1)먼저 '사람'이 있다. 모든 문학 작품의 탐구 대상이 인간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므로, 조해진의 소설에 '사람'이 있다는 말은 그리 특별하게 들리지 않지만, 그냥 사람이 아니다. 더 정확히 쓰면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흔히 '타자'로 요약되기도 하는 이들. 조해진의 소설에는 그런 타자들이 나온다. 아주 가깝고 친한 사람들이 아니고, 아예 모르는 사람, 예전에 몇 번 만난 적은 있는데 지금에 와서는 기억도 나지 않고 친한 것은 더더욱 아닌 사람, 아니면 처음 본 사람, 심지어는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한다. 2)그리고 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비극'이 일어난다. 줄이면 '나와는 상관없는 비극'일 것이다. 3)그런데 이 '나와 무관한 비극'은 선량한 인물들에 의해 '기억'된다. 조해진의 특기는 바로 이 부분에서 나온다. 바로 나와 무관한 비극을 나 자신과 치명적으로 연결 짓는 것. 따라서 작품이 이 부분에 도달하면, 나와는 무관했던 타인의 비극, 타자의 슬픔은 이제 나의 몫이 된다. 비극을 기억하겠다는 의지가 조해진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타자를 인식하려 애쓰고, 자신과 무관한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만들어내려 노력한다. 조해진의 소설들이 '관계없는' 사람들로부터 출발하여 마지막에는 그들의 '관계있는' 모습을 보여 주며 끝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왜? 타인의 비극을 기억하고 인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4)윤리 때문이다. 그것은 이 작가가 말하려 하는 윤리 의식의 한 형태이다. 그녀가 타자, 그중에서도 소수자나 약자, 사회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 집단 등을 자주 작품의 대상으로 삼곤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나와 무관하다는 착각,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무관심이야말로 비극을 비극답게 만든다는 것. 그저 자신과 무관한 누군가를 '타자'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상관하고 싶지 않을 때 상관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들을 '타자'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던 것은 아닌지. 이 점을 꼬집으며 언제나 조해진 작가는 타자와 비(非)타자의 경계를 무너뜨려왔다. 그렇게 소설을 써 왔다. 1)'사람'에서 2)'비극', 그리고 '3)기억'을 거쳐 결국에는 하나의 4)'윤리'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이 소설들은 그렇게 '조해진의 소설'이 되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녀가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단 한 작품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녀가 써 온 소설들, 그리고 앞으로 써 갈 소설들을 모두 필요로 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사람-비극-기억-윤리라는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는 주제의식의 구현을 그녀가 소설을 쓰는 일종의 '목표'라고 한다면, 그녀는 그 '목표'를 한 편의 소설로만 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탄생시킨, 혹은 탄생시킬 모든 소설들의 총합으로써 성취해내려 하는 것이다. 소설가로서 그녀에게는 세상에 '해야 할 이야기'(목표)가 있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소설 쓰기에 있어 완벽함이란 없기 때문에, 그녀의 목표는 어떤 소설을 써 내더라도 완벽히 달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또 쓴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형태로. 따라서 조해진의 소설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하나의 테마의 수많은 변용이자 변주이다.

그러므로 '조해진의 소설은 다 비슷비슷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부분적으로 맞는 말일지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한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두고서 쓴 작품들이므로. 하지만 그것이 결코 결점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은, 그녀는 여러 이야기를 다양하게 펼치는 작가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갈고닦아 이야기하는 작가이고, 이것은 결코 무의미한 반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삶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심을 분산시키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파고들려 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광범위한 작가는 아닐지언정 깊이 있는 작가임에는 분명하다. 그녀는 같은 이야기를 변주해 나가면서 작가로서의 깊이를 늘리며 자신의 목표에 점점 다가가는 중이다. 이 책의 말미에 '작가의 말'에서 그녀가 직접 쓴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녀의 목표란, "타인에 대해 쓰는 것"이다. 정답도 없고 해답도 없는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녀가 계속 소설을 쓰는 것일 터. 따라서 그녀가 앞으로도 같은 주제를 놓고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해 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지루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2. 왜 그녀의 소설들은 읽기 어려울까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인데, 사실 이는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며 이미 대답한 것이기도 하다.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어딘가에서 읽었던 문장을 인용하면, 그녀의 소설들이 어려운 이유는 '악은 쉽고 선은 어렵기 때문이다'.


위에서 썼던 대로, 정말로 그녀의 소설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윤리'라면 그것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만약 손쉽게 행할 수 있는 그런 가벼운 종류의 도덕에 불과했더라면, 그토록 처절하게 문학을 통해 구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녀가 바라는 세상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비극에 무관심하지 않는 세상일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가 창조한 인물들은 타인의 상처에 공감할 줄 알고, 그 슬픔과 고통을 기억하려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과 싸우려 한다. 이런 윤리를 쉽게 쓴다면 어떤 방식이 될까. 예컨대 "타인의 슬픔에 공감합시다." 혹은 "과거의 비극을 잊지 맙시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써 버린다면, 물론 알아듣기는 쉽겠으나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전달'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빛의 호위>라는 작품을 다 읽어야만 전달되는 그 무엇이 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볼 수는 있겠으나, 요약된 한 문장으로 그 소설을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나 그것이 진정한 소설이라면 말이다.

게다가 이 작가가 말하는 '선'이, 앞서 말한 대로 타자의 비극을 기억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것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흔하지 않은 윤리다. 따라서 작가의 의무는 이 '흔치 않은' 일을 당연하고 또 마땅한 일로 설득시키는 일일 테고, 이 작업은 여러 개별 사례를 최대한 다양이 보여 주는 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예컨대 그녀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어떤 특별한 개념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녀의 소설에는 하나의 관계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들의 여러 관계가 등장하며, 이는 말하자면 '관계들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다른 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또 한 번 관계를 맺는다는 것. 따라서 이 이중의 관계 속에서 독자들이 길을 잃게 되는 것도 예삿일은 아니다. 이 소설집의 어느 소설을 펼치더라도 이 '이중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는 삼중의 관계이거나 그 이상도 종종 발견된다. <산책자의 행복>에서 예를 찾아보자.

먼저 '나'는 유실물 센터에서 일한다. 그는 끝내 주인을 찾지 못하고 폐기되는 유실물들의 마지막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낀다. 여기에서 첫 번째 관계가 발생한다. '나-유실물'의 관계다. 한편 '나'의 고모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으며 조금씩 기억을 잃어간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두 번째 관계는 '고모-기억'의 관계다. 이제 첫 번째 관계와 두 번째 관계는 새로운 관계로 연결될 수 있다. 첫 번째 관계의 '나'는 두 번째 관계에서 '고모'로, '유실물'은 '기억'으로 대응되며 이 두 관계가 다른 듯해 보여도 본질적으로 같은 관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해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조금 더 복잡하게 끌고 가는데, 중반부에 등장하는 '서군'이 그 역할을 한다. 그는 '고모'가 과거 사랑했던 남자이자, 학생 시절 혁명 운동에 참여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된 뒤, 근육이 마비되는 병에 걸린 인물로, 그의 존재는 이 이야기에서 세 번째, 네 번째 관계를 추가적으로 형성하면서 이야기를 훨씬 복잡하게 끌고 간다. 이를테면 '학생 운동가-혁명에의 열정'이랄지, '서군-정상적인 근육'이랄지. 모두 '상실'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 있는 관계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의 복잡한 연쇄 혹은 상호작용은 그녀의 소설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에서 말했듯이 설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녀가 말하는 '선'은 누구나 알고는 있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의 단독적인 사례를 두고 읽는 이를 설득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러 사례를 보여 주려 하고, 그 각각의 관계에서 공통점을 발견한 뒤, 그 관계들을 또 하나의 더 큰 관계로 묶어 내는 방식을 택한다. 이렇게 이중, 삼중의 보호막을 둘러싸면 그녀가 말하는 '선'은 더욱 견고해지고 튼튼해지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들은 위태롭고 부실한 이야기보다는 그러한 견고한 이야기에 비로소 설득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이제, 저 두 번째 질문에 다시 대답을 해 주자. 조해진의 소설들이 읽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악을 이해하는 일보다 선을 이해하는 일을 훨씬 어려워하며, 이 작가는 그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그녀의 소설을 쉽다고 말하는 이들이 반드시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예감한다. 선을 완벽히 이해하고, 또 100% 실천하고 있는 신적인 존재이거나, 아니면 선을 배우려는 마음도 능력도 부족한 사람이거나. 그러니 바라건대, 그녀의 소설들이 내게 앞으로도 계속 어렵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녀가 구태여 쉽게 쓰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작가 조해진의 문학 세계를 둘러싼 두 가지 의문에 변변찮게 대답해 보았다. 사실 이 질문의 출처는 개인적인 의문으로부터였다. "왜 다들 비슷하게 느껴질까?"와 "왜 이렇게 읽기 어려울까?"는 누구보다도 내가 조해진의 소설을 읽으며 많이 가져왔던 의문이었기에, 이 글은 그 의문에 스스로 답을 궁리해 본 결과지만 기회가 된다면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이 글의 가장 첫 부분에서, 위의 두 질문에 대답하는 일이 우선은 작가 조해진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 외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고, 이를테면 우리가 왜 문학을 읽는지를 설명하는 일과도 연관 있어 보인다고 썼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기에 대해 말할 차례다.





3. 왜 문학을 읽는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의 많은 의미 중 하나는 그것이 타인에 대한 공부라는 점에 있다. 슬픈 소설을 읽는 일은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일이 되고, 연애 소설을 읽는 일은 타인의 사랑을 공부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소설 읽는 일은 타인을 읽는 일이다. 그리고 소설을 '잘' 읽는 사람이란, 타인을 '잘' 읽어내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와 싸워야 한다. 첫 번째로 '비슷함'과 싸워야 하고 두 번째로 '어려움'과 싸워야 한다. 비슷함과 싸워야 한다는 말은 요컨대 이런 뜻이다. 타인을 바라봄에 있어 '비슷비슷하다'는 적당함으로 때우려 하지 말 것. 얼추 비슷하다고 대강 훑고 마는 것은 결코 문학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그 어느 장르보다도 문학(특히 소설)은 인간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데에 가장 탁월한 장르이고, 따라서 소설을 '잘' 읽었다면 어느 한 사람도 비슷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어려움과 싸워야 한다는 말은, 타인의 내면을 깊이 인식하고 공부하는 일이란 누구에게나 어려운 게 당연하므로, 항상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타인에 대한 공부는 어렵고 힘든 공부다. 그러나 우리의 독서는 그 어려움을 이겨 내는 독서가 되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나는 소설을 읽는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조해진의 소설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일지 모른다.





12.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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