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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Dec 29. 2021

인간 감정의 성장기

#34. 서른네 번째 책) 채사장, <소마>


감정이야말로 영웅만이 갖는 비범함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는 평범함입니다.

<소마>는 전설적인 영웅 신화가 아니라 실제적인 감정 보고서입니다.

서른네 번째 책, <소마>, 채사장, 한국, 2021.






화살이 아니라 화살을 찾아가는 과정이
너를 어른으로 만든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379p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소설은 성장 소설이다. '성장'의 서사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무엇이 성장하는가? 우선 일차적으로 가능한 대답은 이것이다. 주인공 '소마'의 성장이라는 것.

소마가 어린 시절, 청년 시절, 그리고 노년의 시절을 통과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순서대로 보여 주는 이 소설은, 흘러가는 시간 순서를 정직하게 따르며 소마의 인생을 보여 준다. 소마는 '소마'였다가, 부모를 잃은 고아였다가, 바가렐라 가문에 입양된 '사무엘'이었다가,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 돌아와 다시 '소마'가 되었다가, 적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아틸라'였다가, ……마지막에는 벌거벗겨진 채 세상을 떠돌다 죽는다. 총 381페이지에 걸쳐 나타난 '소마'의 일대기를, 평범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자란 한 소년이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지만 끝내 온 세상을 호령하는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올라 세상을 제 손안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르다가, 결국 나이가 들어 힘을 잃고 쇠락하다 못해 끝내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중국의 <삼국지>나 <초한지>에서 볼 법한 영웅 신화의 일종으로 요약해도 좋을까.

다만 <소마>에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무엇이 성장하는가'를 물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두 번째 대답과도 연관 있다. 이 소설을 단순히 '소마'라는 인물의 성장기로 볼 수도 있지만, 한 번 이렇게 말해 볼까. <소마>는 인간 감정의 성장기라고.






감정도 성장하는가. <소마>를 읽어 보면 그런 것 같다. 이 이야기가 <삼국지>나 <초한지>의 서사와 다른 점은, 이들에게서 한 인물의 비범함과 영웅적인 면모를 전설적/신화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면, <소마>에서는 한 인물의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사실적/보편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예컨대 소마가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는 <초한지>에서 '항우'가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와 완전히 다르다. 항우의 목적이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이른바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누가 보아도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소마의 목적은 '복수'다. 이것은 개인적인 감정이고 누가 보더라도 '영웅적'인 신화의 소재로는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영웅 신화의 창조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21세기에 '영웅 신화'란 사실 불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완전무결하고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태어날 때부터 비범했으며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운명의 계시를 받아 인간 세상에 도래한 신적인 영웅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을 만큼 계몽된 사회에 살고 있다. 더 이상 문학의 관심사 역시 그런 신화적 영웅에 있지 않다. 대신 '지극히 평범한 개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지금 문학이 유일하게 탐구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그리고 <소마>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소마'가 아니라 '소마의 감정들'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마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따라가는 일에서 큰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 인물의 성장과 쇠락이라는,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서사이기 때문에. 대신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은, 소마와 소마를 둘러싼 떠들썩한 사건들이 아니라, 소마의 감정들을 따라가는 일이다. 소마의 고통과, 소마의 외로움과, 복수심과 질투와 분노와 욕망과 체념과 공허함… 들 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일 텐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웅만이 가질 수 있는 비범함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평범함이기 때문이다.

소마의 인생에는 많은 굴곡이 있고, 우리는 이를 몇 가지 챕터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챕터를 구분하는 척도는 반드시 소마의 감정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소마가 '사무엘'로 살아가던 시절을 한 챕터로 친다면, 이 챕터를 '외로움'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외로움과 소외감이 소마를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또 소마가 '아틸라'로 살아가던 시절을 또 하나의 챕터로 구분한다면, 이 챕터의 이름은 '복수심'이다. 그가 복수심과 분노의 지배를 받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그의 감정들은 '성장'한다. 외로움에서, 복수심으로, 또 공허함으로… <소마>에는 내가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훨씬 많다. 그 수많은 감정들이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고,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소마가 겪는 각종 사건 사고들이 아니라 그를 지배하는 감정들이어야 할 것이다. <소마>를 한 영웅의 성장기가 아니라 인간 감정의 성장기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다시 한번 이 소설을 요약해 보면, <소마>는 소마의 일생이 아니라 감정의 일생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감정들의 일생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문장들이 마치 휘몰아치듯 읽혔다면 그 강한 감정들의 힘을 우리가 제대로 느낀 게 아닐까.


모두가 말하듯, 소설은 간접 경험이다. 어떤 소설이든,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간접적인) 경험의 일종인 것. 그렇다면 <소마>는 어떤 경험이었나. 이 소설이 제공하는 경험을 '감정적 충격'이라 표현하고 싶다. 극도의 분노와 극도의 비참 같은 것들이 이 소설을 구성한다. 소마의 감정은 유유히 흘러간다기보다 넘치고 휩쓸리고 몰아치는 것에 가까우며, 이 극단적인 감정들이 조금의 상쇄도 없이 저들의 뾰족한 극단을 유지하며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는 것이 <소마>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강렬한 경험이다. 그리고 작품 속 소마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그 경험들이야말로, 우리를 어른으로 만든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웨일북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쓰였습니다.





12.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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