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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Dec 18. 2021

구분 짓지 않는 윤리

#30. 서른 번째 책) 오르한 파묵, <하얀 성>


이 작품이 지워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삶을 가로지르는 모든 형태의 구분선일 것이고,

이 작품이 그려낸 것이 있다면 서로가 얼마나 닮았는지 발견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세계는 그렇게 한 번 지워졌다가 다시 그려집니다.

서른 번째 책, <하얀 성>, 오르한 파묵, 터키, 1985.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218p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을 역사 소설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책의 뒷면에 수록된 '작가의 말' 부분을 읽어 보면 오르한 파묵 자신도 이 소설이 역사 소설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정하는 쪽에 가깝다. 그렇다면 <하얀 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터키의 역사를 참고하는 것은 분명 타당한 일일 것이다. 터키와 터키를 둘러싼 동/서양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하얀 성>은 이 책을 번역한 이난아 역자의 글 쪽이 훨씬 정확하다.

하지만 <하얀 성>이 좋은 소설인 이유 중 하나는,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이 필수적이는 않다는 점이다. 터키의 정치/사회와 관련한 문제적 담론에 관해, 그리고 이 소설이 탄생하기까지의 역사적 배경에 관해 전혀 무지하더라도, 이 소설은 잘 읽히고 또 잘 '이해'된다. 다시 말해 터키와는 동떨어진 문화권에서, 터키의 사회와 역사적 지식이 전무한 누군가(바로 나와 같은 사람)에게도, 이 이야기는 잘 작동한다. 따라서 <하얀 성>은 역사 소설이지만 역사 소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을 역사에 근거해 읽는 것이 작품의 깊이를 두 배로 느끼게 해 주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의 아름다움이 반드시 그러한 조건 위에서만 유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이 작품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 관한 많은 해설이 그러하듯,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터키의 문화적 아이러니가 <하얀 성>의 모티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가닿을 수 있는 힘이 이 소설에 있다. 그것을 소설의 '확장 가능성'이라 말할 수 있다면, <하얀 성>은 하나의 역사적 비의에서 출발했지만 성공적으로 '확장'하여 이젠 그 역사를 뛰어넘어 존재하게 된, 그런 소설이다.






1.


눈에 보이지 않는 구분선이 세상을 여러 갈래로 단절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구분은 국가 단위에서 거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개인 단위에서 미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할 텐데, 그렇게 우리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구분 짓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이 소설은 쓰였다.


우선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축으로, 이탈리아인인 화자 '나'와 터키인인 '호자'가 있다. '나'는 터키 함대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호자'가 '나'를 노예로 삼게 되면서 살아남는다. '호자'란, 선생이나 지식이 넓은 사람을 일컫는 말로, 따라서 그의 이름이 아니고, '나' 역시 '나'로 나올 뿐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게 두 이름 없는 인물들은 노예-주인 관계로 설정되며 같이 살아간다. 그런데 이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방으로 들어온 남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와 닮은 모습이었다. 내가 저기에 있다니! …
-31p


소설의 초반부에 해당하는 이 부분은 이미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작가가 직접 쓴 표현을 빌려 말하면, 이러한 "쌍둥이-닮은 사람"의 모티프가 작품 초반부터, 물론 유심히 살펴야만 보이겠지만, 대놓고 깔려 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이 놀라울 만큼 닮았다는 사실을 '나' 이외의 다른 인물들은 인지하지 못한다는 설정 역시 상징적으로 보인다.

이제 이 복선을 잘 붙들고 작품의 결말 부분으로 이동하면,


우리는 침착하게, 말없이 서로의 옷을 바꿔 입었다. 그에게 내 반지 그리고 몇 년 동안 감추어두었던 메달을 건네주었다. 메달 안에는 증조 외할머니의 초상화와 저절로 변해버린 내 약혼녀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 잠이 몰려왔다. 그의 침상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잠을 잤다.
-221p


이렇게 '나'와 '호자'가 서로 뒤바뀌어 '나'는 '호자'가 되고 '호자'는 '나'가 되는, 이 충격적인 결말이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양 당연한 결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둘은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심지어는 증조 외할머니의 초상화와 약혼녀의 머리카락이 든 소중한 물건까지 교환한다. 그런데 그게 뭐가 그리 놀랍냐는 듯이, 바뀐 상대의 침상에, 이제는 그 상대가 자기 자신이 된 채로 들어가 '편안하게 잠을 자는' 인물의 모습은 마치 독자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조롱이 맞을 것이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약 200페이지에 걸쳐 성실히 묘사되어 온 두 인물을 따로따로 인식해왔고, 두 인물의 이미지나 특징, 분위기 따위를 각각 머릿속에서 그려왔을 터인데, 이제 와서 그 둘이 갑자기 뒤바뀐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장면에는 '불편함'이 있다. 의도된 불편함이고, 이 장면의 저 태연한 묘사로 말미암아 더욱 극대화되는 불편함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불편함은 따로 있다. 단순히 두 인물이 바뀌었다는 사실보다 독자들을 더욱 불편함으로 몰아넣는 것은, 두 인물이 바뀌었는데도, 엄연히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교체'되었는데도, 세상이 아무렇지 않게 진행된다는 점.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호자'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꾸고, '호자'는 '나'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대체하는, 이런 일은 가능한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인물이 서로 바뀌어도 무방하다면, 애초에 그 둘은 사실 둘이 아니라 하나였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잘못은 두 사람이 서로 바뀌었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 이상한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였던 것을 억지로 둘로 갈라놓았던 그 무의식적인 '구분'에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귀류법의 논리로 생각해 보면, 모순이 발생한 이유는 잘못된 가정 때문이다. 바로 '나'와 '호자'를 다른 존재로 구분해왔다는 오류를 범한 것.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둘을 처음부터 구분하지 않았다면 모든 게 말이 된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면 소설 속의 이 두 인물이 처음부터 '하나'가 되기 위해 존재하던 '둘'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말하자면 '나'와 '호자'는 작가에 의해 명백한 하나의 목적을 갖고 탄생한 인물들이고, 그 목적이란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합리한 '구분 짓기'를 거부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구분의 무용함과 무의미함을 증명하는 데 있을 거라는 추측이다. 작품 내내 두 인물의 '닮음'이 계속해서 강조되고, 최종적으로는 서로가 완벽하게 치환되는 결말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둘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그래서 둘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또한 이렇게 쓸 수도 있다. 두 인물을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한 일이라는 사실은 이 작품의 주제 의식과도 연관 있다.






2.


구분 짓는 일이 잘못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구분'이 구분의 대상자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느냐일 것이다. 이를테면 동양과 서양을 구분 짓는 일이 서양을 문명과 근대화의 상징으로, 반면 동양은 개발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시선을 조장한다면 그 구분은 폭력에 다름없을 것이다. '서구화'가 '현대화'의 동의어로 쓰이면서 문화적인 '다름'이 너무나 쉽게 문화적인 '우열'로 변질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이를 서양과 동양 사이의 암시적인 지배-피지배 관계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폭력이 도처에 있다. 그리고 터키는 이러한 동/서양의 구분 짓기가 행하는 폭력(말하자면 '폭력적 구분')을 더욱 실감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문화적 위치에 있다.

이제 우리는 <하얀 성>에서, 이러한 폭력적인 구분 짓기에 대항하는 한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목소리란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들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167p
처음에 그가 공연히 "우리는 우리를 잘 알고 있을까.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해" 같은 말을 했을 때 나는 그렇게 많이 당황하지 않았다.
-227p


동양이 서양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몰락'이며, 우리는 남이 되지 말고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게 위 문장들의 요지인데, 이는 세상의 모든 무용한 구분짓기를 꼬집는 말이기도 하다. '나'와 '호자'는 베네치아 인과 터키인, 서양의 문화와 동양의 문화, 노예와 주인, 지배받는 자와 지배하는 자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이 두 인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구분선이 존재하고, 이 구분선이 독자들의 무의식 속에서 점차 두드러질 때쯤, 작가는 두 인물을 순식간에 뒤바꾸어 놓는 격한 방식으로 그 구분선의 존재를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구분선의 한 쪽 영역에 속한 사람이 그 절대적으로 보였던 경계를 침범하고 다른 쪽 영역으로 걸어들어갈 때,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그 장면에서, 개인적으로는 다소간 낭패감을 느꼈다. 그 둘을 구분 짓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어쩌면 이 낭패감이야말로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동안의 자신이 얼마나 많이, 함부로, 무언가를 구분 지어 왔는지 성찰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위에서 <하얀 성>은 역사 소설이지만 역사 소설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이 소설을 역사에 근거해 읽는 것이 작품의 깊이를 두 배로 느끼게 해 주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의 아름다움이 반드시 그러한 조건 위에서만 유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이 작품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언급하였다. 지금까지와 같이 이 작품을 동/서양의 문제를 가지고 읽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아마 그것이 작가의 맨 처음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해석의 가능성을 그보다 아주 넓혀 보아도, 이 소설은 그것을 감당한다.

이 소설의 두 축, '나'와 '호자'는 꼭 서양이나 동양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구분선이 폭력적으로 갈라 놓은 그 누구든 대입 가능한 존재다. 성별의 구분, 정치적 구분, … 혹은 어떠한 형태의 구분이든 그것이 '폭력적 구분'으로 변질되어 가는지 성찰해야 한다. 소설 속 '나'와 '호자'처럼, 우리는 사실 너무나 닮았고, 따라서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함부로 구분 짓지 않는 윤리'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하얀 성>이라는 소설이 오늘날까지도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12.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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