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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Jan 31. 2022

영원히 공부하기, 영원히 슬퍼하기

#36. 서른여섯 번째 책) 신 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우리는 신형철을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몇몇 사람들은 그를 교수(님이)라 부를 것이다. 그가 대학교에서 비평론을 강의하는 교수이자 선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얼마간 부러워질 정도였다. 또 한편으로, 그는 문학 평론가 혹은 문학 비평가라고도 불릴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한국 문단에서 유례없는 인지도를 갖게 된 평론가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 명성의 출처는 오로지 그가 써온 글의 힘뿐이다. 미디어나 방송을 통해 대중들에게 노출되어 이름을 알리는, 보다 쉽고 빠른 방법이 있는 것을 그도 알 테지만, 아마도 문학하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관심사는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일해지는 일이 아닐까 싶다. 오직 그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 나 역시 그의 이번 책을 읽고 확실히 느꼈다. 적어도 내게 있어 신형철이라는 작가는, 지독하리만치 유일하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의 이름 앞에 붙을 수 있는 몇 가지 명칭들을 정리해 볼 수 있겠는데, 아마 교수, 지식인, 지성인 따위의 명칭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명칭들의 공통적인 뉘앙스는 그에게 가르치는 자로서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또 우리가 그에게 배울 만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수' 신형철 혹은 '지식인' 신형철은 '가르치는 사람'이고, 그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배운다'. 혹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러한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펼쳐진다. 그의 두 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더욱 절묘하게 읽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점에 있었다. 조금 단정적으로 말하면, 이 책 속에는 '가르치는 자'로서의 신형철은 없다. 대신 '공부하는' 신형철만이 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쓴 글이 아니고, 자신도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 쓴 글이라 하면 조금은 표현이 될까. 이 책에서 그는 자주,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른다고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라, 모르므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강연 중에 '문학은 나태한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다가 잠시 주춤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현실인 '고문'을 비유로 사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처음으로 했다. 계속 공부해야 한다.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43~44p


94쪽을 펼치자 이런 단어가 나온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 그는 폭력을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라고 새롭게 정의해 보며, "더 섬세해질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를 택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잠재적/현실적 폭력이 시작된다"라고 전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종류의 폭력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에게 행할 수도 있음을 근심한다. 그 섬세한 근심을 그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라 부른다. 내가 보기에 그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이미 짙은 사람이지만, 지금보다 더욱 민감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 같다. 위에 인용한 문장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극에 달하면, 나의 무지조차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걸까.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악의에서 탄생하는 폭력이란 말할 것도 없고, 이 작가는 심지어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될 폭력까지도 사려한다. 그래서 그가 공부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

이 책에서 그는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을 자처한다. 그리고 그 '모름'을 '배움'으로 채우기 위해 읽고, 쓴다. 그는 배우지 않으면 계속 모를 것이고, 자신의 그 모름이 누군가에게 잠재적/현실적 폭력을 행하게 될 수도 있다고 믿는, 폭력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 맨 처음 질문에 다시 대답하자. 우리는 신형철을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적어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난 후라면, 그를 이렇게 불러야 옳지 않을까. 그는 공부하는 사람,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그중에서도 특히 그는, 슬픔을 공부하는 사람이다. 슬픔을 공부하면서, 그는 타인을 배운다. 타인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그 모름은 쉽게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형철은 우리가 계속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나서서 자신이 어떤 공부를 했는지/하고 있는지/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은 그가 공부한 흔적이다.






좋은 글을 읽으면 역설적이게도 좋은 글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아마 알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 좋은 글이 왜 좋은지를. 신형철의 글을 읽고 내가 한 고민 역시 이것이었다. "너무 좋은 글인데, 왜 좋을까?"

그러던 차에 이 책 412쪽에 실린, 영화 평론가 김혜리의 에세이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를 읽고 쓴 그의 추천사가 저 질문에 빈틈없는 대답이 되어 주었다. 내게는 이보다 정확하게 설명할 도리가 없어, 그대로 옮기기로 한다.


첫째, 분석. 분석이란 본래 해체했다가 재구성하는 일이어서 작품에 상처를 입히기 십상인데 그가 우아하게 그 일을 할 때 한 편의 영화는 마치 사지가 절단되어도 웃고 다시 붙으면 더 아름다워지는 마술 쇼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둘째, 인용. 그의 말이 지나치게 설득력이 있어 괜히 반대하고 싶어질 때쯤 되면 그는 그가 검토한 해외 인터뷰나 영화평들 중에서 중요한 코멘트를 적재적소에 인용해 독자로 하여금 이 영화의 모든 관계자들이 그의 글을 지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셋째, 비유. 그가 개념적/논리적 서술을 훌륭하게 끝낸 후에 정확한 문학적 비유로 제 논지를 경쾌하게 재확인할 때면 그의 글은 매체(영상과 문장) 간 매력 대결의 현장이 되는데 그는 결코 영화를 이기려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지지도 않는다.
넷째, 성찰. 그는 영화 서사에 잠복돼 있는 '윤리적' 쟁점에 극히 민감한데 그럴 때마다 특유의 실수 없는 섬세함을 발휘해 현재로서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이 이것이겠다 싶은 결론을 속삭여주고는 한다.

-412~413p


나는 위 문장들을 통째로 외우고 싶어진다. 이 글은 그가 김혜리의 글을 읽은 뒤 찬사를 보내기 위해 쓴 것이지만, 나는 이 찬사들을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고 싶다. 그가 위에서 말한 네 가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도 된다면, 여기에 하나만 더 덧붙여 볼까. 분석과 인용과 비유와 성찰, 그리고 그의 글에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다섯째, 책임감.

어떤 책임감이냐 하면, 문학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자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다. 언제나 그의 글에서는 부채감이 느껴진다. 선의를 베풀듯이 쓰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듯이 쓴다고나 할까. 누군가에게는 자유로운 권리일 글쓰기가, 그에게는 마치 도덕적 의무의 하나로 보였다. 이 책의 서문을 보니 이런 표현이 보인다. "세상에는 교환 아닌 것이 별로 없으므로, 좋은 글을 얻고 싶다면 이쪽에서도 가치 있는 것을 줘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시간)을 주지 않으면 좋은 글을 얻을 수 없다는, 다시 말해 자신이 쓴 글들은 전부 자신의 생명 중 일부(시간)와 교환하여 얻은 것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쓰면서 나는 죽어왔다."(6p) 이것은 아마 그가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와도 관련 있을 것이다. 자신은 언어와 문장에 빚을 졌으니 오로지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그 빚을 갚아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부채 의식. 그러니 조금 힘주어 말해도 좋다면, 그는 '목숨을 걸고' 글을 써왔던 게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면 이런 그의 글을 읽지 않는 일은 커다란 손해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좋은 글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좋은 글을 쓸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 것만 같다. 248쪽의 한 문장이 그의 책임감의 한 형태를 잘 보여준다.


가까운 어느 분께서 사람들이 타인의 죽음에 대해 점점 무감해지는 것 같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날 시인들의 책무가 하나 더 늘어난 셈입니다.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이 그것입니다.
-248p


책임감의 표현으로는 물론 여러 가지가 가능하겠지만, 위 문장에서는 그것이 '울음'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됐다.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 그것을 그는 '시인들의 책무'라고 썼지만, 그 누구보다도 그 일이 자신의 책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전부 분석이 훌륭하고 인용이 적절하며 비유가 아름답고 성찰이 깊지만, 무엇보다도 이 글들에게 생명력을 선사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겠다고 예감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책임감에 있다. 그 책임감은, 이 책에서 그에 의해 '슬픔'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지만, 두 단어를 각각 살리면서 표현하면 아마 이렇게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슬퍼할 책임'이 있는 거라고. 이렇게 해서 슬픔을 공부하는 그의 슬픈 공부가 시작되었으리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의 글은 좋은 글이다. 그냥 좋은 글이 아니라 분석과 인용과 비유와 성찰을 책임감으로 엮어 낸, 좋은 글이다.






여기까지가 신형철의 글을 읽고서 내 마음대로 상상해 본 그의 모습이다. '공부하는' 신형철과 '슬퍼하는' 신형철로 줄일 수 있겠다.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게 맞다면, 그는 남들보다 더 공부하려 하고 남들보다 더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비평가가 되고 싶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 있다.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 칭찬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칭찬할 수밖에 없는 작품들에 대해서만 쓰고 싶은 것이며, 그럴 때의 그 칭찬을 '정확'하게 할 줄 아는 비평가가 되고 싶다는 요지에서 한 말이었다. 그의 놀라운 글을 읽고 조악하게나마 써 본 나의 글 중에서, 단 한 문장만이라도 그에게 정확한 칭찬으로 가닿을 수 있었기를 바란다.





01.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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