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1994)
시인은 잘 느끼는 사람이라던가. 재능 있는 시인들은 분명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들보다 잘 느껴서 평범한 것도 평범하지 않게 받아들인다. 오버하고 과장하고 엄살부리는 '능력'이 그들에게는 있다. 그들의 엄살이 하나의 '능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엄살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 '오버'의 기술자들에게는, 예민함도 하나의 재능이고, 실력이다.
아름답게 엄살부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궁금한 분들께서는 나희덕의 두 번째 시집을 펼쳐 보시면 되겠다. 여기에 실린 시들은 예민함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만 겨우 쓰일 수 있는 시들이다. 예민하다는 것은 그 예(銳) 자에서도 짐작되듯 날카롭고 섬세하다는 것이고, 그렇게 예리한 촉수는 뭉툭하고 무딘 끝이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가볍고 뾰족해야만 들어가볼 수 있는 미묘한 틈새들이 있다. 삶의 어떤 틈새들은 날카롭고 예민한 자에게만 그 사이를 들여다 볼 것을 허락한다. 예민함의 재능을 타고난, 혹은 오랜 기간 자신의 예민함을 피땀으로 갈고닦은 이 '뾰족한' 이들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하고도 들어가지 못하는 아주 미세한 균열 사이를 들락날락하는 이들이다. 그 주름의 틈새를 만져볼 수 있을 만큼 뾰족해지는 데 성공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창문은 내 발길 아래 있다.
지하의 방 한 칸,
세상의 볕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고
별조차 내려오지 않는 창문에
달개비꽃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어난다.
버석거리는 밥술과
자욱한 꿈자리, 창에 들이친 흙탕물은
지나가던 내 발걸음 때문이었나.
한때 가난은 나의 것이기도 했는데
가난조차 잃어버린 발길이
함부로 내딛다가 멈춘 자리
지하의 방 한 칸,
오랜만에 불기를 넣었는지
낮은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탄가스가
서성거리는 내 발목을 휘감는다.
가난의 독기는
이제 땅 위의 목숨에게로 흘러간다.
달개비꽃
파랗게 질린 입술로 떨고 있다.
-50~51면, 「달개비꽃 피는 창문」 전문
이 시인이 '가난'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라. 이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는 빈과 부를, 가난한 삶과 넉넉한 삶을 단순하게 비교하지 않는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시인의 예민함은 부와 가난 사이의 작은 균열 하나를 파고든다.
우선 지상의 존재들이 반지하의 작은 방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거리의 소음과 먼지는 "내 발길 아래 있"는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당연한 듯 흘러들어갈 것이다. "버석거리는 밥술"이 아프게 이 사실을 환기한다. 화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창에 들이친 흙탕물은/지나가던 내 발걸음 때문이었나." 요컨대 지상에서 벌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들은 지하의 존재에게 얼마든지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지상의 발길들은 이 시의 표현대로 "함부로 내딛"은 발길들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놀라울 것은 없다. 이 시가 진정 섬세해지는 대목은 바로 "가난의 독기는/이제 땅 위의 목숨에게로 흘러간다"인데, 여기에는 앞의 것과는 역방향의 폭력이 나타난다. 지상이 지하에게 가하는 폭력이 아니라 지하가 지상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추위를 견디다 못해 "오랜만에 불기를 넣"은 지하방. 제대로 된 보일러조차 갖추지 못한 곳에서 살기 위해 겨우 때운 불이었을 텐데, 이 연탄가스는 거리로 흘러나와 사람들의 숨을 막는다. 그 유독한 가스가 "가난의 독기"가 되어 "땅 위의 목숨들"을 위협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상/지하로 구별된 빈과 부의 양측은 이제 서로에게 위해를 가한다. 그간 어느 한 쪽만 고통받거나, 어느 한 쪽만 일방적으로 악하게 그려져왔던 빈과 부의 관계가 재설정되고, 이제 서로는 서로를 죽음으로 내몬다. 지상은 저도 모르는 새에 지하에게 폭력을 행하고, 지하는 제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상에게 폭력을 행한다. 그리고 이 비정한 싸움을, 지상도 지하도 아닌 곳에 핀 "달개비꽃"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예민하다는 것은, 그리고 섬세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을 뭉툭하게 봐서는 저 슬픈 싸움에 질려버린 달개비꽃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섬세한 눈과 손으로 "달개비꽃"을 포착할 때, 이 시가 그의 예민한 재능이 낳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더 있다.
아마도 누구든지 이 시 「달개비꽃 피는 창문」를 읽으면서 비슷한 풍경을 떠올렸을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어쩌면 나희덕의 이 시를 읽고서 구상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이 두 작품은 다루는 소재도 물론 닮았으나 그 소재들을 다루는 방식도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하의 가족들이 지상의 가족들을 죽이는 씬은, 이 시에서 지하가 지상에게 폭력을 가하는 모습과 통한다. 이를 나희덕 식으로 말하면 "가난의 독기"가 "땅 위의 목숨에게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을 당할 뿐 아니라 폭력을 가하는 가난. 한 편의 시와 한 편의 영화는 섬세함과 예민함을 매개로 비슷한 지점에서 만난다.
시가 할 수 있는 일과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겠다. 좋은 시든 좋은 영화든, 예민한 사람이 만들 수 있다.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예민해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이 그 예민함의 여정에서 가능한 가장 멀리까지 가게 되기를 바란다. 이미 날카로운 그들이지만 더 날카로워지기를 기대한다. 위에서 말했듯, 우리로 하여금 그런 기대를 품게 만드는 이들을 시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면, 「달개비꽃 피는 창문」을 쓴 나희덕 선생도 시인이고 『기생충』을 찍은 봉준호 감독도 시인이겠다. 두 시인의 작품들은 우리를 한층 더 예민해지게 만들 것이다.
05.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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