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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May 16. 2022

이토록 예술적인 여행

#52번째 책) 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1994)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반드시 소설을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할 순 있지 않을까. 소설은 그것을 읽는 이에게나 쓰는 이에게나, 일종의 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뭐 놀라울 것도 없는 말이지만 최근에는 주변 누군가로부터 여행자가 두 종류로 나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와 관련하여 소설을 생각해보려 한다. 여행자를 두 부류로 나눈다면, 숙소에서 푹 쉬고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가 오는 것을 진정한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부류(1), 그리고 정 반대의 경우, 즉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최대한 많이 보고 경험하고 체험하려고 애쓰는 부류(2)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1)의 경우 여행은 편안함의 총체여야 한다. 제대로 쉬고 '재충전' 해야 한다. 반면 (2)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여행을 갔다 오면 몸이 힘들다. 일찍 일어나 온종일 걸어다니며 그 여행지에서만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웬만하면 하나도 빠짐없이 경험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분류는 꽤 타당해 보인다. 둘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후자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 더 좋은 여행이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이 두 가지와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먼저 (1)에 속하는 이들은 소설이라는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힐링' 혹은 '휴식', '쉼' 같은 것들을 꼽을 것이다. 이들처럼, 우리는 소설 읽는 일을 하나의 휴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쉬고, 편안함을 느끼고, 무엇보다 그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에게 '재미없는 소설'을 읽는 일이란, 여행이 아니라 노동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후자의 경우처럼, 소설 읽는 일을 하나의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여행하는 사람들이고, 그 소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웬만하면 하나도 빠짐없이 발견하고 싶어 한다. 재미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인식'이다. 소설을 읽는 일이 (1)에게는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2)에게는 '해석'을 불러 일으킨다는 표현을 쓰면 이해가 쉬울까.

어쨌든 이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확실히 아니다. 그저 다를 뿐일 텐데, 이러한 '다름'은 왜 발생할까. 아마도 여행이 목적이냐 수단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할 것 같다. (1)에게 여행은 분명 수단이다. 그들은 여행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고, 또한 그 '쉼'으로 인해 여행이 끝난 뒤 일상을 재시작할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일상의 단조로움을 벗어나는 수단, 일상의 피로를 풀기 위한 수단, 그리고 다시 일상을 영위할 동력을 구하는 수단,으로써 여행한다. 그리고 소설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에 읽는다. 그러나 (2)는 다르다. 이들에게 여행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엇'이 가치있는 게 아니라 '여행 그 자체'가 가치있는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여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행이 끝나고 몸져눕는 한이 있더라도 '여행'이라는 그 목적을 최대한으로 달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제 '여행'을 '예술'이라는 단어로 치환하면 (1)과 (2)의 차이는 다음의 문장 하나로 요약된다. '일상이냐, 예술이냐'. 일상의 환기 정도로 예술을 대한다면 이들은 (1)에 속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예술은 일상을 활기차게 해 주거나 더 풍요롭게 한다. 이들은 예술을 '이용'한다. 어디까지나 내 삶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예술이 있다. 그러나 그 당연해 보이는 주종 관계가 뒤집힌 (2)의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예술을 '이용'하지 않고 '갈구'한다. 예술을 일상의 목적으로 대하는 사람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이 없는 내 일상은 의미 없다고, 반복적인 일상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 또 있겠느냐고. 우리는 정말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든 어떤 이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을 적절히 불러 주기 위해 ‘예술가’라는 좋은 단어가 우리에게 있지 않나.


아무튼 서두가 꽤 길었는데, 결국 하려던 말은 이것이었다. 소설 <새로운 인생>을 쓴 오르한 파묵은, 내가 보기에 (2)에 속한다. 그는 예술가다. 그는 목적으로써 소설을 읽고, 또 목적으로써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의 소설은 너무 어렵고, 심오하고, 따라서 보편적인 의미에서 결코 '재미'있지 않다. (1)의 독자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오르한 파묵이 우리가 여행해야 할 하나의 여행지라면, 분명히 그곳은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한 곳은 아닐 것이다. 그곳은 불편하고 시끄러운 장소다. 자꾸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또 불친절한 사람들만 가득한 곳이다.

하지만 (2)의 사람들에게 이곳은 멋진 여행지가 될 수 있다. 다른 여행지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할 '오르한 파묵적인' 일들로 가득한 곳. 그의 소설에서는 거의 모든 문장이 해석의 대상이다. 따라서 어떤 독자들은 스스로를 혹사시키면서도 오르한 파묵을 읽으려 한다. 그의 작품들이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르한 파묵을 읽는 일은, 위악적으로 말하면 사실 괴로운 일이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를 읽는다. 언젠가부터 소설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 이후로는, 삶을 위해 예술을 하는 작가보다 이미 예술이 된 삶을 사는 작가들이 진정 흥미롭다.

『새로운 인생』은 어떤 소설인가.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은 뒤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고백하는 화자의 말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그 문제의 책이 무슨 내용인지, 그리고 그의 인생이 도대체 어떻게 바뀌었다는 건지,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의아하기만 하다. 이 극도로 난해한 소설을 두고 평범한 제목에 속지 마시라는 후기들도 많이 보인다. 확실한 것 하나는,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예술가고, 『새로운 인생』은 우리 시대의 한 탁월한 예술가가 그려내는 예술가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그 미친 예술가와 여행을 떠난다. 미리 말하건대 즐거운 여행은 아니겠지만 '예술적인' 여행은 될 것이다.



05.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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