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번째 책)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1997)
시란 실패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어떤 실패를 기록했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을 기록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에 가깝다. 이 말속에는 언어에 대한 불신이 들어 있다. 어떤 감정을, 혹은 어떤 진실을 우리의 언어가 결코 정확히 표현해낼 수 없다는 불신. 그 불신은 아마 타당할 것이다. 가령 '슬프다'는 말은 얼마나 부정확한가. 축구를 하다가 발목을 삐었을 때도 '슬픈' 것이고 가장 친한 친구를 사고로 잃었을 때도 '슬픈' 것이라면, 이 광범위한 말이 어떤 정확한 진실을 포착하고 있다고 믿기 어렵다. 그 순간의 진실은, 그리고 그 진실과 결부된 내 감정은, 그렇게 부정확한 언어로 어설프게 번역되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언어는 진실을 보존하지 못하고 훼손한다. 이런 말들이 지나치게 들리는가?
그러나 이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은 시인이라 불린다. 이들은 그 부정확하고 비논리적인 언어와 싸운다. 이들은 발목을 삐었을 때 '슬프다'보다 더 정확한 다른 표현이 존재할 것이라 믿는 이들이고, 친구가 사고로 죽었을 때도 단순히 '슬프다'는 말 말고 진실에 가까운 다른 언어에 도달하려는 이들이다. 어떤 시인도 쉽게 쓰고 말지 않는다. 가령 이들은 '슬프다'는 쉬운 말 대신 이렇게 쓸 줄 아는 이들이다. "내가 주워올린 것은/흙 묻은 나의 심장이었다"(<그때 나는> 중) 시인들은 기존의 언어를 믿지 않으므로 다른 언어를 찾는다. 굳이 이렇게 어렵게 써야 하냐고? 그들은 쉬운 말을 버리고 일부러 어려운 말을 택한 게 아니다. 부정확한 말을 버리고 정확한 말을 택한 것이다. 아니, 택했다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정확해지기 위해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직업의 기반을 언어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언어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시인이다. 어떻게든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고 해체하고 파괴해서 그것이 진실을 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인의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이것이 핵심이다.) 완벽한 말이란 있을 수 없고, 그런 것을 꿈꾸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어떻게 표현하든 진실은 새어나가기 마련. 모든 시인의 꿈이 언어가 진실을 담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생각이 말이 되어 튀어나오고 현실이 텍스트가 되어 쓰여지는 순간 원래의 것은 손상을 입는다. 손실 없는 번역은 없다.
따라서 언어와 진실 사이의 관계에서, 언어는 언제나 진실의 포로다. 진실이 언어의 포로인 것이 아니고, 언어가 진실에 끌려다닌다. 진실이 꼭 한발 앞선다. 언어는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꼬리잡기를 하고 있다. 시가 늘 실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시인도 이 점에 있어 완벽히 성공한 적은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 다만 그 실패가 아름다운 실패인 것은, 시인들이 잡을 수 없는 진실을 언어로 잡으려고 할 때 그들의 그 불가능한 노력이, 우리의 가능한 체념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희덕의 세 번째 시집을 펼쳐 보니 이런 실패가 보인다.
놀고 들어온 아이가 양말을 벗으며 말했다
-아빠가 불쌍해요.
-왜, 갑자기?
-아빠는 죽어가고 있잖아요.
-대체 무슨 소리야?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죽는다는데
아빤 우리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으니까요.
양말을 뒤집어도 바지를 털어도 모래투성이다
아이는 매일 모래를 묻혀 들어온다
그리고 모래알보다 많은 걸 배워서 들어온다
사람은 죽어가는 게 아니야,
살아가는 거야,
하지만 나는 밥을 안치면서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66면, 「황사 속에서」 부분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게 키우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 그러나 밖에 나갔다 온 아이는 세상의 더러운 면도 보고 지저분한 말도 듣는다. "모래를 묻혀 들어온" 저 아이가 세상의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될까 부모는 "양말을 뒤집어도 바지를 털어도" 보지만, 완벽히 털어낼 수는 없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죽는다"는 당연한 비극도, 아직은 아이가 몰랐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바람. 그러나 아이는 "모래알보다 많은 걸 배워서 들어온다".
그 비감(悲感)을 이 시는 표현하려 했겠다. 그러나 그 심정, 직접 느껴보지 않았다면 어찌 알겠는가. 이 시를 읽는 것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시는 참 잘 쓰였지만, 저 순간의 진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 완벽하게 정확하지 않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아이에게 사람은 죽어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거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화자는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언어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표현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언어는 무력하다. 그래서 이 시는 실패다. 다른 모든 시가 그렇듯이 이 시 역시, 실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것인가? 언어가 진실을 정확히 담도록 하는 그 불가능한 일을, 우리는 포기해도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다, 반대로 말하자. 그 불가능을 포기하지 않는 이야말로 시인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시인이 아니고, 잘 알면서도 계속 쓰는 이가 시인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언제나 실패하고, 기꺼이 실패한다. 자신이 실패할 거라는 걸 잘 알면서 실패한다. 그들의 글은 그 실패의 흔적이고, 시란 실패의 기록이다.
시인 나희덕은 작년에 아홉 번째 시집을 냈다. 첫 시집이 91년도에 출간되었으니 대략 3-4년에 한 번꼴로 시집을 내 온 셈이다. 그 꾸준함이 나는 경이롭다. 삼십 년이 넘도록 쉬지도 않고 거듭 실패해온 셈,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아마 몇 년 후에는 열 번째 시집으로 또 우리를 찾아오겠다. 그녀는 또 쓰고 또 쓸 것이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05.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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