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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May 20. 2022

『작은 것들의 신』 확장판

#54번째 책) 아룬다티 로이, 『지복의 성자』, 문학동네(2020)


어떤 이는 20년을 기다렸을 소설. 1997년 아룬다티 로이는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걸작을 발표하며(무려 데뷔작이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 놓고는, 뻔뻔하게도 20년을 침묵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에세이와 논픽션을 썼으니 정말 침묵이라 말할 순 없어도, 우리가 기다렸던 것은 정치적 올바름과 인권, 윤리를 외치는 그녀의 커다란 목소리가 아니라(물론 그것도 박수받을 만한 일이지만), 자신의 데뷔작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현란하게 보여 줬던, 위로가 필요한 곳에 정확하게 도달하는 기도의 목소리였다. 전자가 사회를 말할 때 후자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을 아주 깊숙히 말해서 그것이 결국은 다른 사람의 모습이거나 우리 사회 전체의 모습이 되게끔 만든다. 정치와 도덕과 철학이 큰 문제를 큰 소리로 외칠 때, 문학은 작은 문제를 작게 속삭인다. 앞의 것들이 위를 향해 끝없이 올라가서 전체를 내려다볼 때, 문학은 안으로 안으로 끝없이 파고드는 이상한 방식으로 전체에 도달한다. 그녀의 소설은, 그 일이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문학이 잘 하는 일이며 다른 어떤 소설가보다도 자신이 잘 하는 일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켰었다.

이제 20년짜리 기다림이 보상받을 시간. 한국에는 3년 늦게 도착했지만, 2017년,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이 나왔다. 이 소설은 『작은 것들의 신』을 뛰어 넘을 작품일까. 뒤늦게 읽어 본 한 독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지복의 성자』가 전작 『작은 것들의 신』의 확장판처럼 느껴졌다. 미리 밝혀 두건대 그 '확장판'이라는 말은 이번 소설이 가진 장점과 한계 모두에 해당할 수 있다.






『지복의 성자』가 『작은 것들의 신』의 확장판이라 말한 것은 이번 소설 역시 '작은 것들의 신'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지복의 성자'라 불리는 '사르마드'는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의 위안"(544면)으로 묘사된다. 즉 그는 작은 것들의 신이다. 소외받고 억압받는 존재들을 소외시키지도 억압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그녀 특유의 작업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보잘것없는 존재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존재들이다.

그 '작은 것'들을 발견하는 밝은 눈이 전작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주시했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카스트 뿐 아니라 성별과 종교를 주로, 그러나 사회와 권력과 정치까지도 주시하고 있다. '작은 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녀는 카스트에서도, 종교에서도, 성별에서도, 어디에서나 그 비속한 존재들을 섬세하게 발견한다. 그렇게 아주 개인적인 한 인간(혹은 한 가족)을 다룬 『작은 것들의 신』이야기는 한 집단, 한 사회, 한 시대, 그리고 한 국가를 다룬 범인도적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그녀의 첫 소설이 한 인간의 비극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인도의 비극이다.

이러한 확장판에서 인물들은 더 다양해지고 내용은 더 복잡해졌다. 담론의 차원이 커지고 이야기가 비대해졌다. 아마 이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정치운동가이자 인권 옹호가, 환경운동가… 의 수식어를 달고 있는 그녀가 추구하는 가치와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에게도 좋은 일이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이 소설로 큰 목소리를 얻었으나 깊은 목소리를 잃었다. '정치적인 것'을 '문학적인 것'과 교환해 얻은 셈이다. 그러니 이번 소설이 보여주는 그 '확장'이 넓이로서의 확장이지 깊이로서의 확장이 아니었다는 점이 진정 유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소설이 계속 커지지 말고 계속 작아지기를 바랐다. 소설 『작은 것들의 신』에서 언제나 감탄스러운 대목은 '신'이 아니라 '작은 것들'로부터 나왔었다. 그럴 때 그녀는 보편적인 것과 진리적인 것의 가장 반대편, 즉 개인적인 것과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가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으로 얼마나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때, 그녀는 진정 위대해 보였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문학의 '높은' 경지가 아니라 '깊은' 경지였다.

그러나 두 번째 소설에서 그녀는 깊어지는 대신 높아졌고, 두터워지는 대신 넓어졌다. 그렇게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확장'되면서 『지복의 성자』는 페이지 수는 더 늘어났음에도 『작은 것들의 신』이 도달했던 만큼 멀리까지 가지는 못했다. 이 소설이 거창한 이야기를 거창한 목소리로 풀어나가는 동안, 정작 인물들의 작은 목소리들이 거기에 묻혀 버린 것은 아닌가 의아스럽기도 했다.

20년 동안이나 다음 소설이 나오지 않자 일각에서는 그녀가 완전히 논픽션 작가로 전향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일었다고 한다. 이번 소설의 출간으로 그런 추측들은 종결되었겠지만 나는 그녀의 신작 소설이 어쩐지 논픽션의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고 느꼈다. 실제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말하자면, 그녀가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때문에 이 소설은 자주 교술적 분위기를 띄는데, 2002년 극우 힌두교도들이 일으킨 종교 폭동이나 1996년 카슈미르에서의 분리독립운동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특히 그렇다. 그러나 넓은 땅을 개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이 문학의 일이다. 한 권의 역사서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한 편의 소설이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완성도 높은 소설인 것은 확실하다. 이 소설은 해야 할 일을 했고, 또 그 일을 높은 수준으로 해낸 것으로도 보인다. 다만 나는 이 소설이 해낸 일이, 오직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이번 소설의 두 인물을 두고 "그는 자신의 확실성으로 인해 축소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호성으로 인해 확대되었다"고 말했다. 문학에서 확실한 것만큼 빈약한 것은 없다. 모호함이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그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소설에서 인물들의 그 모호함을 더 지독하게 파고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 더욱 아쉬운 것일지 모른다.

다음 소설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그녀는 천천히 쓰는 작가 중에서도 단연 천천히 쓰는 작가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 다만 그녀의 세 번째 소설은 이번보다 더 '작은' 소설이 되기를 바란다. '더 작은 것들의 신'에 대해 써 주기를. 그녀의 첫 소설을 읽고 돌이킬 수 없는 신뢰를 갖게 된 나는 그렇게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소설이 아쉽다고 말하기보다는, 이 소설이 갈 수도 있었는데 가지 못한 길이 아쉽다고 말하겠다.



0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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