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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May 29. 2022

어렵게 쓰인 쉬운 시

#55번째 책) 박노해, 『노동의 새벽』, 풀빛(1984)


평론가 현준만은 이 시집을 "민중시대 민중문학의 한 전형"이라 평가했다. 시인 고은은 이 노래(시)들이 "노동해방문학의 주제가"라고 말했고, 평론가 김상일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면서 그 영역을 교란시키고 극복"한다고 평가하며 이 시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단연 압권인 것은 이 시집에 실린 문학 평론가 채광석의 해설이다. 그 글에서 선생은 박노해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에 "80년대 민중시의 한 절정"이라는 아름다운 주석을 달고 있다.

이 시집에 바쳐진 애정어린 찬사들은 그러나 과거의 것들이다.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민중'은 이 시집에서 다음과 같은 단어들과 결합한다. 예컨대 '민주주의' '노동해방', '혁명'… 같은 단어들. 그러나 지금도 그런가? 그것들이 70년대와 80년대에 우리 민중의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한 측면을(혹은 그 이상을) 형성했던 것은 사실이겠으나 지금은 아닐 것이다. 우리 세대의 누구도 민주주의와 노동해방과 혁명을 예전과 같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하지 않는다. 『노동의 새벽』을 2022년에 읽는 일은, 예전처럼 "민중시의 절정"이라던가 "하나의 사건"과 같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시의 '수명'과 연관 있는 문제일 것이다. 박노해의 첫 시집에 실린 시들은 제 수명을 당시의 시대에 기대고 있다. 시대에 맞서기 위해 쓰여진 이 시들은 그 시대가 저물었을 때 함께 저물었다. 당시 시대의 비정함이 그것들을 쓰게 하였으므로, 이 시들은 그 시대에 반론을 제기하고 저항하는 것으로써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수명을 다한 시들에게 우리가 느낄 '문학적인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신 이 기념비적인 시집에게는 다른 가치들, 이를테면 '역사적'이거나 '시대적'인, 혹은 본받을 만한 '정신적'인 가치들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박노해의 시편들을 읽으며 느낀 한 가지는, 이 시들이 '쉽다'는 것이었다. 문장들이 직관적이고 명료해 읽는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쓰는 입장에서도 쉽게 만들어진 시처럼 보였다. 예컨대 그가 군대 가는 후배에게 "그대는 군에서도 열심히 살아라/(…)/오직 성실성과 부지런한 노동으로만/당당하게 인정을 받아라"(「썩으러 가는 길」 중) 라고 말할 때, 그는 쉽게 말한다. "굳센 믿음으로 옳은 실천으로/끈질긴 집념으로/서둘지 말자/그러나 쉬지도 말자"(「당신을 버릴 때」 중) 라는 구절에서도, 참 쉽다. "당당하게 당당하게/나아가리라"(「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중) 라는 외침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귀에는 너무나 쉽게만 들린다. 당연한 말들이고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닌가. 이 쉬운 말들이 그의 입에서 쉽게 튀어나올 때, 거기에는 정확한 표현을 위해 고민한 흔적 같은 것이, 시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언어의 고뇌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들이 쉽다는 사실은 이 시집의 단점과 성취 모두에 관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쉬운 말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쉽고 당연한 말조차 해서는 안 되는 시대가 있었다. 이 시집은 발간과 동시에 금서로 조치되었다. 이 시집이 하는 말들이,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신뢰와 사랑 속에/동료를 위해 사는 것처럼 큰 희열이 어디 있을까"(「아름다운 고백」 중) 처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당연한 말들인데도 그랬다. 우리 역사의 어느 시기에는, 쉬운 말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니 이 시들은 쉽지만, 쉽다고 마냥 비난할 것이 못 된다. 쉽게 읽혔다면, 그것은 우리가 2022년에 살기 때문이다. 1984년에 이 시집의 문장들은 누구도 감히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 쉬운 문장들을 40년 전의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썼을 것을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어떤 글이건 자꾸 읽을수록 쉬워진다. 반복할수록 처음의 낯섦은 사라지고 익숙함만 남기 때문이겠는데, 『노동의 새벽』과 같은 작품들은 그 반대다. 익숙함이 사라지고 점점 낯설어진다. 이 시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처음 펼쳤을 때는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박노해라는 사람에 대해, 그의 삶에 대해,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고 다시 읽으면 이 쉬운 글을 쓰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상상하게 된다. 당시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이 시집을 읽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 시대의 우리에게 이 시집은 쉽다. 이 시집을 읽는 일이 쉬워서는 안 된다는 말은, 우리가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05.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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