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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May 14. 2022

진실한 입과 진심의 시

#50. 쉰 번째 책) 나희덕, 『뿌리에게』, 창비(1991)


삼십 년 전 『뿌리에게』가 출판됐다. 이 첫 시집에서 나희덕 시인의 관심사는 대개 둘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학교와 사회다. 전자라면 그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국어 교사였다는 사실과 관련 있겠고, 후자라면 그가 교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회인이라는(한국인이라는) 사실과 연관 있겠다. 그러나 학교도 흔히 말하듯 하나의 사회에 다름 아니라면, 그 둘의 구분은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시에는 자신이 겪은 슬픈 학교의 모습도, 온갖 ‘억압’ 그 자체였던 사회의 모습도 잘 드러나 있지만, 그것들은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수렴한다. 바로 ‘80년대’. 이 시집이 발산하는 힘은, 한 시인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치열한 방식으로 80년대를 살아냈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이른바 돌멩이와 최루탄의 시대였던 당시를 시인 나희덕은 어떻게 통과했나. 이 시편들이야말로 80년대의 가장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 중 하나일 터, 그로부터 삼십 년 후의 세대에게 이 시집이 그 무슨 역사서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 당연한 것들이 당시에는 당연하지 않았고, 지금의 당연함은 과거 세대가 당당히 싸워 이긴 결과로 얻어낸 것이므로, 그 ‘승리한 전쟁의 역사’를 한 시인의 내면에서 발견하는 일도 물론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제 그의 시를 읽는 일은, 삼십 년 전 스물 여섯의 한 교사가 제 몸의 안팎으로 겪어 낸 80년대의 역사를 체감하는 일과 다르지 않겠다. 그리고 그 간접 체험은 80년대를 겪어 본 적 없는 (나와 같은) 90년대 이후의 세대들에게는 특히나 소중하다. 육체적인 것만이 투쟁이 아니다. 당시에 어떤 이들은 해야 할 말을 하는 방식으로도 투쟁했다. 아마도 이 투쟁 속에는 그녀가 지키려 했던 하나의 진실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대부분의 시에서 그 진실은 문학적 기교보다는 온전한 진심을 통해서 전달된다. 잘만 읽는다면, 시 속에 떠다니는 80년대의 진실 하나를, 그리고 그 진실에 들러붙어 있을 시인의 어떤 진심 하나를, 우리가 건져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은 내가 건져낸 것들이다.






1. 진실한 입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두세살부터
영재교실에서 과외를 받는 아이들

유치원에서 피아노, 주산, 태권도, 컴퓨터까지
하루 동일 바쁘신 아이들

30평은 30평끼리
17평 주공은 17평 주공끼리
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짝을 맞추어 잘 노는 아이들

프라이드를 타고 온 친구의 아버지를
비웃을 줄도 아는 콩코드의 아이들

지나가는 사람에게
돈 줄 테니 저 공 좀 건져달라고
벌써 유능하게 사람을 부리는 사장님의 아이들

뛰놀 만한 언덕 하나 없어
5층 아파트 옥상에서 연을 날리며
얼레를 풀어 동심을 날려보내는 아이들

그 위태로운 하늘 끝,
어디선가 날아온 새 한 마리가
쓸쓸한 어깨 위를 맴돌고 있다

-44~45면, 「어떤 아이들」 전문


이 시가 80년대 진실을 보여 주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 겨우 말을 떼기 시작할 때부터 영재 교육과 각종 학원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바쁘신 아이들”, 잘 사는 아이들은 못 사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거라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심지어는 못 사는 아이를 “비웃을 줄도 아는”, 그런 아이들. 어린 시절부터 너무 늙어버린 아이들일까. 6연의 “연을 날리며/얼레를 풀어 동심을 날려보내는 아이들”이란 구절은,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늙어가는지도 모른 채 동심을 날려 보낸다. 이 연날리기는 그래서 슬프다.

이 쉽고 단순한 시가 유난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분명 이 “아이들”이 우리가 아는 아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내 모습이었거나, 지금 내 아이의 모습일 저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리얼’해서 어떤 우회도 거치지 않고 곧장 달려와 마음에 꽂히는 것이다. 2연의 “유치원에서 피아노, 주산, 태권도, 컴퓨터까지/하루 종일 바쁘신 아이들”이라는 문장을 읽는 일은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심하게 말하면 이 “아이들”의 모습은 하나의 폐허다. 그 폐허의 한복판에서, 이 아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해야 한다는 교사의 운명은 시인을 또 한 번 쓸쓸하게 만든다. 다른 시를 보자. “팍팍한 땅에 심겨지고자 하는 나무,/그런 네가 돌아오려는 이곳은/넓지도 기름지지도 않은 땅이란다.”(「학교로 돌아오려는 제자에게」 중.) 이 “팍팍한 땅”, “넓지도 기름지지도 않은 땅”이 그저 학교 뿐이겠는가? 세상이 다 그렇다. “네가 태어나 살아갈 세상은/이처럼 험한 돌밭에 눈물바다인데” (「태교」 중.) 뱃속의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이런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혹하다. 이 참혹한 현실을 시인은 아파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쓴다. 왜? 그럼에도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그 진실이란, 예컨대 이런 문장들로 붙잡힌다.


오늘도 조간신문 위에는 십오 세의 소년이
수은 중독으로 실려 나가고
그 기사에 우리는 잠시 놀란 얼굴이 될 뿐
오히려 그 위에 피어난 꽃을 즐기고 있구나

-70면, 「꽃병의 물을 갈며」 부분


강철로 된 듯한 문장들. 이 문장들이 야생동물을 우리에 가두듯 진실을 포획한다. 그녀의 시 쓰기 작업은 아마도 이 외면받는 진실들을 사냥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 그녀가 말했듯이, "만물은 녹아내려/고통의 강물이 흐르는데"(「소경의 노래」 중.) 눈 먼 자처럼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할 수 없는 말을, 혹은 해서는 안 될 말을 꼭 해야만 했을 것이다. 마침 「소원」이라는 시에서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교사가 된 아들에게 그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다. "내 소원이 무언지 아느냐,/네가 진실한 입 하나 가지고 사는 거다." 고통과 대면할 용기가 있는 자만이 그 '진실한 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용감했다.

이 진실들은 그러나 과거의 진실만에 그치지 않는다. 저 아픈 진실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진실이라는 점이, 우리가 곰곰이 곱씹어야 할 또 하나의 진실이기도 하다. 위에서 이 시들이 ‘80년대 진실의 한 사례를 보여 줄 것’이라고 썼지만, 사실 의문이다. 이 시들이 보여주는 풍경이 80년대의 현실을 정확히 포착했는지가 의문인 게 아니라, 과연 이 풍경들이 80년대에만 해당될 뿐인지가 의문이다. 삼십 년 전에 쓰인 저 슬픈 진실들은 아무리 봐도 여전히 우리의 현실에 다름 아니다. 시 속의 그 “아이들”은 지금도 살고 있다.






2. 진심의 시


진심은, 그것이 진정한 진심이라면, 언제나 기어코 전달되고야 마는 것 같다. 이 시집을 아무리 읽어 봐도 이 시인의 목소리가 꾸며 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참다 참다 못해 끝내 터져 나오는 목소리랄까, 최후의 외침이랄까, 마침내 토해내는 비명 같달까. 한 단어로 써야 한다면 결국 '진심'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엇이 이 시들을 구성한다. 나희덕의 첫 시집에서 그녀의 시들은 그 무엇보다도 진심의 시라고 불릴 만하다. 발문을 쓴 정현종 선생은 "나는 늘, 자기가 쓰는 바를 안팎으로 살아야 좋은 글이 된다는 말을 해 오고 있는데, 이 시집의 경우에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127면)라고 말하며 중요한 단어 하나를, -바로 '육화'라는 단어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자기 스스로 겪은 게 아니라 뉴스나 소문을 듣고 쓴 작품들은 (…) 섬세한 느낌과 육화에 이르지 못하고…", 128면) 이 단어는 정현종 선생뿐 아니라 나희덕 시인의 입에서도 튀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집의 '후기(後記)'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꽃의 향기에 비해 과일의 향기는 육화된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다. 나의 시가 그리 향기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기 때문이다."(134면) 두 시인(정현종과 나희덕)이 동시에 말하고 있는 저 '육화'란 무엇이기에?

시를 써본 적은 없어도 시 쓰는 일이 '내 얘기'를 하는 일임은 알고 있다. 꼭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이거나 해야만 하는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의 시는, 나의 이야기이자 내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여야 한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백 명의 시인이 시를 쓴다고 하면, 백 가지의 전혀 다른 시가 나와야 한다. 단 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을 것이고, 같은 이유로 단 한 사람의 시도 다른 사람의 시와 같아서는 안 된다. 이는 시인이 사물을, 타인을, 혹은 세계를 충분히 제 나름으로 '육화'하는 데 성공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육화란 바로 그런 것, 즉 시와 삶을 일치시키겠다는 뜻이다. 내가 살아온 대로 쓰겠다는 것이고, 반대로 내가 살아온 것 이상으로는 쓸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산 만큼 쓴다"는 말은 시인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아닐까. 이는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아니 한 줄의 문장조차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면 갖기 힘든 태도다.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창밖으로 타오르는 노을을 보며
하늘에 대고 몇 장이나 사표를 썼다.
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두고 나와
남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심정,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눈망울을 뒤로 하고
내가 밝히려고 찾아가는 그곳은
어느 어둠의 한 자락일까.
이 어둡고 할일 많은 곳에서
師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사표를 쓰게 된다면
그 붉은 노을을 언제 고개 들고 다시 볼 것인가.
하늘에 대고 마음에 대고 쓴
수많은 사표들이 지금 눈발 되어 내리는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눈길을 밟고 따라와
교실문을 가로막는데
나는 차마 종이에 옮겨적을 수가 없다.
붉게 퇴진하는 태양처럼
장렬한 사표 한 장 쓸 수는 없을까.

-54~55면, 「辭表」 전문


참 눈물겹도록 진심어리다. 특히 화자가 "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두고 나와/남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심정"이라 말하는 구절은 그 심정을 직접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쓸 수 없었을 문장이리라. 화자는 교사이자 어머니이다. 밖으로는 교사가 되어 아이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지도해야 하겠고, 안으로는 한 명의 어머니로서 자식을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 교사로서 하는 일과 어머니로서 하는 일이 어딘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이 시를 읽고 나면 그 두 일이 현실적인 면에서 어떻게 상충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눈길을 밟고 따라와/교실문을 가로막는데"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 상충은 교사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닌 나와 같은 독자가 보기에도 지나친 딜레마로 보였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심지어 '교사'와 '어머니'는 그 자체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딜레마의 한복판에서, 화자의 고민은 진심을 통해 고백된다. 화려한 수사법도 복잡한 비유도 다 필요 없다는 듯 제쳐두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말하려고 노력할 뿐인 이 순박한 화법. 여기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진심을 진심어리게 털어놓는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이것을 탈이데올로기적 순수 화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순화해서 쓰자면 이렇다. 그녀의 시는 진심의 시다. 그녀가 故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시에서 "우리에게 땅이 없다/그대의 시신을 안고 도망쳐 나왔지만/따뜻하게 묻어줄 땅이 없다"고 말할 때(「그대를 어디에 묻으랴」 중.)에도 그녀는 진심이고, 시위가 한창이던 시절 "동료가 해직당하고 선배가 잡혀가는 중에도/(중략)/나는 여기에 남아 있구나"(「손톱」 중.)하며 부끄러워할 때도 그녀는 진심이고, "네가 듣지 못하는 노래,/이 노래를 나는 들어도 괜찮은 걸까/네가 말하지 못하는 걸/나는 감히 말해도 괜찮은 걸까"(「手話(수화)」 중.)라며 예민한 윤리적 감수성을 보일 때 역시, 그녀는 진심이다. 늘 진심이다. 자신이 아는 것만 쓰고, 겪은 것만 쓰며, 자신이 '산 만큼' 쓰기 때문에 그렇다. '육화'된 것만 쓰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늘 진심이어야지만 쓸 수 있는 시를, 그녀는 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그런 종류의 진심은 예외 없이 상대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그녀의 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어딘가에 제대로 도달한다.


좋은 시들이 너무나 많은 시집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많은 '좋은 시'들 중 한 편을 함께 읽으며 마치자. 위에서도 인용한 바 있던 「소원」의 일부를 옮긴다.


내 소원이 무언지 아느냐,
네가 진실한 입 하나 가지고 사는 거다.

아이들에게는 올바른 교사가 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감싸주는 시를 쓰거라,
아버지의 이마 위로 피어오르는 이 소원이
얼마나 멀고도 아픈 길 끝에 나온 것인지
진정으로 살아남는 길이 무엇인지 저를 가르칩니다.

-103면, 「소원」 부분


이 첫 시집에서 그의 아버지는 소원을 이루셨다.





05.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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