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쉰 번째 책) 나희덕, 『뿌리에게』, 창비(1991)
삼십 년 전 『뿌리에게』가 출판됐다. 이 첫 시집에서 나희덕 시인의 관심사는 대개 둘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학교와 사회다. 전자라면 그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국어 교사였다는 사실과 관련 있겠고, 후자라면 그가 교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회인이라는(한국인이라는) 사실과 연관 있겠다. 그러나 학교도 흔히 말하듯 하나의 사회에 다름 아니라면, 그 둘의 구분은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시에는 자신이 겪은 슬픈 학교의 모습도, 온갖 ‘억압’ 그 자체였던 사회의 모습도 잘 드러나 있지만, 그것들은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수렴한다. 바로 ‘80년대’. 이 시집이 발산하는 힘은, 한 시인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치열한 방식으로 80년대를 살아냈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이른바 돌멩이와 최루탄의 시대였던 당시를 시인 나희덕은 어떻게 통과했나. 이 시편들이야말로 80년대의 가장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 중 하나일 터, 그로부터 삼십 년 후의 세대에게 이 시집이 그 무슨 역사서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 당연한 것들이 당시에는 당연하지 않았고, 지금의 당연함은 과거 세대가 당당히 싸워 이긴 결과로 얻어낸 것이므로, 그 ‘승리한 전쟁의 역사’를 한 시인의 내면에서 발견하는 일도 물론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제 그의 시를 읽는 일은, 삼십 년 전 스물 여섯의 한 교사가 제 몸의 안팎으로 겪어 낸 80년대의 역사를 체감하는 일과 다르지 않겠다. 그리고 그 간접 체험은 80년대를 겪어 본 적 없는 (나와 같은) 90년대 이후의 세대들에게는 특히나 소중하다. 육체적인 것만이 투쟁이 아니다. 당시에 어떤 이들은 해야 할 말을 하는 방식으로도 투쟁했다. 아마도 이 투쟁 속에는 그녀가 지키려 했던 하나의 진실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대부분의 시에서 그 진실은 문학적 기교보다는 온전한 진심을 통해서 전달된다. 잘만 읽는다면, 시 속에 떠다니는 80년대의 진실 하나를, 그리고 그 진실에 들러붙어 있을 시인의 어떤 진심 하나를, 우리가 건져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은 내가 건져낸 것들이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두세살부터
영재교실에서 과외를 받는 아이들
유치원에서 피아노, 주산, 태권도, 컴퓨터까지
하루 동일 바쁘신 아이들
30평은 30평끼리
17평 주공은 17평 주공끼리
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짝을 맞추어 잘 노는 아이들
프라이드를 타고 온 친구의 아버지를
비웃을 줄도 아는 콩코드의 아이들
지나가는 사람에게
돈 줄 테니 저 공 좀 건져달라고
벌써 유능하게 사람을 부리는 사장님의 아이들
뛰놀 만한 언덕 하나 없어
5층 아파트 옥상에서 연을 날리며
얼레를 풀어 동심을 날려보내는 아이들
그 위태로운 하늘 끝,
어디선가 날아온 새 한 마리가
쓸쓸한 어깨 위를 맴돌고 있다
-44~45면, 「어떤 아이들」 전문
이 시가 80년대 진실을 보여 주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 겨우 말을 떼기 시작할 때부터 영재 교육과 각종 학원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바쁘신 아이들”, 잘 사는 아이들은 못 사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거라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심지어는 못 사는 아이를 “비웃을 줄도 아는”, 그런 아이들. 어린 시절부터 너무 늙어버린 아이들일까. 6연의 “연을 날리며/얼레를 풀어 동심을 날려보내는 아이들”이란 구절은,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늙어가는지도 모른 채 동심을 날려 보낸다. 이 연날리기는 그래서 슬프다.
이 쉽고 단순한 시가 유난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분명 이 “아이들”이 우리가 아는 아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내 모습이었거나, 지금 내 아이의 모습일 저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리얼’해서 어떤 우회도 거치지 않고 곧장 달려와 마음에 꽂히는 것이다. 2연의 “유치원에서 피아노, 주산, 태권도, 컴퓨터까지/하루 종일 바쁘신 아이들”이라는 문장을 읽는 일은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심하게 말하면 이 “아이들”의 모습은 하나의 폐허다. 그 폐허의 한복판에서, 이 아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해야 한다는 교사의 운명은 시인을 또 한 번 쓸쓸하게 만든다. 다른 시를 보자. “팍팍한 땅에 심겨지고자 하는 나무,/그런 네가 돌아오려는 이곳은/넓지도 기름지지도 않은 땅이란다.”(「학교로 돌아오려는 제자에게」 중.) 이 “팍팍한 땅”, “넓지도 기름지지도 않은 땅”이 그저 학교 뿐이겠는가? 세상이 다 그렇다. “네가 태어나 살아갈 세상은/이처럼 험한 돌밭에 눈물바다인데” (「태교」 중.) 뱃속의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이런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혹하다. 이 참혹한 현실을 시인은 아파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쓴다. 왜? 그럼에도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그 진실이란, 예컨대 이런 문장들로 붙잡힌다.
오늘도 조간신문 위에는 십오 세의 소년이
수은 중독으로 실려 나가고
그 기사에 우리는 잠시 놀란 얼굴이 될 뿐
오히려 그 위에 피어난 꽃을 즐기고 있구나
-70면, 「꽃병의 물을 갈며」 부분
강철로 된 듯한 문장들. 이 문장들이 야생동물을 우리에 가두듯 진실을 포획한다. 그녀의 시 쓰기 작업은 아마도 이 외면받는 진실들을 사냥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 그녀가 말했듯이, "만물은 녹아내려/고통의 강물이 흐르는데"(「소경의 노래」 중.) 눈 먼 자처럼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할 수 없는 말을, 혹은 해서는 안 될 말을 꼭 해야만 했을 것이다. 마침 「소원」이라는 시에서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교사가 된 아들에게 그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다. "내 소원이 무언지 아느냐,/네가 진실한 입 하나 가지고 사는 거다." 고통과 대면할 용기가 있는 자만이 그 '진실한 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용감했다.
이 진실들은 그러나 과거의 진실만에 그치지 않는다. 저 아픈 진실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진실이라는 점이, 우리가 곰곰이 곱씹어야 할 또 하나의 진실이기도 하다. 위에서 이 시들이 ‘80년대 진실의 한 사례를 보여 줄 것’이라고 썼지만, 사실 의문이다. 이 시들이 보여주는 풍경이 80년대의 현실을 정확히 포착했는지가 의문인 게 아니라, 과연 이 풍경들이 80년대에만 해당될 뿐인지가 의문이다. 삼십 년 전에 쓰인 저 슬픈 진실들은 아무리 봐도 여전히 우리의 현실에 다름 아니다. 시 속의 그 “아이들”은 지금도 살고 있다.
진심은, 그것이 진정한 진심이라면, 언제나 기어코 전달되고야 마는 것 같다. 이 시집을 아무리 읽어 봐도 이 시인의 목소리가 꾸며 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참다 참다 못해 끝내 터져 나오는 목소리랄까, 최후의 외침이랄까, 마침내 토해내는 비명 같달까. 한 단어로 써야 한다면 결국 '진심'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엇이 이 시들을 구성한다. 나희덕의 첫 시집에서 그녀의 시들은 그 무엇보다도 진심의 시라고 불릴 만하다. 발문을 쓴 정현종 선생은 "나는 늘, 자기가 쓰는 바를 안팎으로 살아야 좋은 글이 된다는 말을 해 오고 있는데, 이 시집의 경우에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127면)라고 말하며 중요한 단어 하나를, -바로 '육화'라는 단어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자기 스스로 겪은 게 아니라 뉴스나 소문을 듣고 쓴 작품들은 (…) 섬세한 느낌과 육화에 이르지 못하고…", 128면) 이 단어는 정현종 선생뿐 아니라 나희덕 시인의 입에서도 튀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집의 '후기(後記)'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꽃의 향기에 비해 과일의 향기는 육화된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다. 나의 시가 그리 향기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기 때문이다."(134면) 두 시인(정현종과 나희덕)이 동시에 말하고 있는 저 '육화'란 무엇이기에?
시를 써본 적은 없어도 시 쓰는 일이 '내 얘기'를 하는 일임은 알고 있다. 꼭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이거나 해야만 하는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의 시는, 나의 이야기이자 내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여야 한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백 명의 시인이 시를 쓴다고 하면, 백 가지의 전혀 다른 시가 나와야 한다. 단 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을 것이고, 같은 이유로 단 한 사람의 시도 다른 사람의 시와 같아서는 안 된다. 이는 시인이 사물을, 타인을, 혹은 세계를 충분히 제 나름으로 '육화'하는 데 성공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육화란 바로 그런 것, 즉 시와 삶을 일치시키겠다는 뜻이다. 내가 살아온 대로 쓰겠다는 것이고, 반대로 내가 살아온 것 이상으로는 쓸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산 만큼 쓴다"는 말은 시인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아닐까. 이는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아니 한 줄의 문장조차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면 갖기 힘든 태도다.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창밖으로 타오르는 노을을 보며
하늘에 대고 몇 장이나 사표를 썼다.
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두고 나와
남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심정,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눈망울을 뒤로 하고
내가 밝히려고 찾아가는 그곳은
어느 어둠의 한 자락일까.
이 어둡고 할일 많은 곳에서
師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사표를 쓰게 된다면
그 붉은 노을을 언제 고개 들고 다시 볼 것인가.
하늘에 대고 마음에 대고 쓴
수많은 사표들이 지금 눈발 되어 내리는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눈길을 밟고 따라와
교실문을 가로막는데
나는 차마 종이에 옮겨적을 수가 없다.
붉게 퇴진하는 태양처럼
장렬한 사표 한 장 쓸 수는 없을까.
-54~55면, 「辭表」 전문
참 눈물겹도록 진심어리다. 특히 화자가 "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두고 나와/남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심정"이라 말하는 구절은 그 심정을 직접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쓸 수 없었을 문장이리라. 화자는 교사이자 어머니이다. 밖으로는 교사가 되어 아이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지도해야 하겠고, 안으로는 한 명의 어머니로서 자식을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 교사로서 하는 일과 어머니로서 하는 일이 어딘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이 시를 읽고 나면 그 두 일이 현실적인 면에서 어떻게 상충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눈길을 밟고 따라와/교실문을 가로막는데"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 상충은 교사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닌 나와 같은 독자가 보기에도 지나친 딜레마로 보였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심지어 '교사'와 '어머니'는 그 자체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딜레마의 한복판에서, 화자의 고민은 진심을 통해 고백된다. 화려한 수사법도 복잡한 비유도 다 필요 없다는 듯 제쳐두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말하려고 노력할 뿐인 이 순박한 화법. 여기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진심을 진심어리게 털어놓는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이것을 탈이데올로기적 순수 화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순화해서 쓰자면 이렇다. 그녀의 시는 진심의 시다. 그녀가 故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시에서 "우리에게 땅이 없다/그대의 시신을 안고 도망쳐 나왔지만/따뜻하게 묻어줄 땅이 없다"고 말할 때(「그대를 어디에 묻으랴」 중.)에도 그녀는 진심이고, 시위가 한창이던 시절 "동료가 해직당하고 선배가 잡혀가는 중에도/(중략)/나는 여기에 남아 있구나"(「손톱」 중.)하며 부끄러워할 때도 그녀는 진심이고, "네가 듣지 못하는 노래,/이 노래를 나는 들어도 괜찮은 걸까/네가 말하지 못하는 걸/나는 감히 말해도 괜찮은 걸까"(「手話(수화)」 중.)라며 예민한 윤리적 감수성을 보일 때 역시, 그녀는 진심이다. 늘 진심이다. 자신이 아는 것만 쓰고, 겪은 것만 쓰며, 자신이 '산 만큼' 쓰기 때문에 그렇다. '육화'된 것만 쓰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늘 진심이어야지만 쓸 수 있는 시를, 그녀는 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그런 종류의 진심은 예외 없이 상대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그녀의 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어딘가에 제대로 도달한다.
좋은 시들이 너무나 많은 시집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많은 '좋은 시'들 중 한 편을 함께 읽으며 마치자. 위에서도 인용한 바 있던 「소원」의 일부를 옮긴다.
내 소원이 무언지 아느냐,
네가 진실한 입 하나 가지고 사는 거다.
아이들에게는 올바른 교사가 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감싸주는 시를 쓰거라,
아버지의 이마 위로 피어오르는 이 소원이
얼마나 멀고도 아픈 길 끝에 나온 것인지
진정으로 살아남는 길이 무엇인지 저를 가르칩니다.
-103면, 「소원」 부분
이 첫 시집에서 그의 아버지는 소원을 이루셨다.
05.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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