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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May 10. 2022

병을 듣는 일

#49. 마흔아홉 번째 책) 문태준, <그늘의 발달>


문태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그늘의 발달』은 사무치는 시집이다. 여기에 실린 수많은 슬픈 시들 중 하나를 겨우 골랐다. 제목은 「문병」. 이번에는 이 시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먼저 읽어보자.


그대는 엎질러진 물처럼 누워 살았지
나는 보슬비가 다녀갔다고 말했지
나는 제비가 돌아왔다고 말했지
초롱꽃 핀 바깥을 말하려다 나는 그만두었지
그대는 병석에 누워 살았지
그것은 수국(水國)에 사는 일
그대는 잠시 웃었지
나는 자세히 보았지
먹다 흘린 밥알 몇 개를
개미 몇이 와 마저 먹는 것을
나는 어렵게 웃으며 보았지
그대가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으므로
그대의 입가에 아주 가까이 온
작은 개미들을 계속 보았지

-「문병」 전문


문병(問病). 한자를 그대로 풀면 병을 묻는다는 뜻이다. 병을 앓는 사람을 찾아보고 위로하는 일을 두고 우리는 병을 ‘묻는다’ 한다. 누가 이 단어를 처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참 효율적인 압축이지 싶다. ‘묻는다’라는 말 안에는 ‘걱정한다’도 있고, ‘위로한다’도 있고, ‘기도한다’ 혹은 ‘함께 슬퍼한다’도 들어 있으니까 말이다. 경우에 따라 ‘묻는다’가 이렇게나 많은 의미를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말은 왜 이렇게 슬플까. 나는 문병이라는 말이 불러오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 봤다. 왜 문병이라는 단어에는 어딘가 사람 마음을 아슬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건지. 이것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은 그 단어 안에 두 사람이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 아픈 사람과 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혹은 서 있는 사람과 (몸져)누운 사람. 이 두 사람의 대비는 ‘문병’을 ‘질병’이나 ‘투병’ 같은 말보다 더 슬픈 말로 만든다. 뒤의 말들에는 병든 이만 있지만, ‘문병’이란 말에서는 병든 이가 건강한 이와 함께 놓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도 있는데 한 사람이 병과 고통스럽게 싸울 때 다른 한 사람은 그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록 그 내용이 다르더라도 이 둘은 고통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러한 두 사람의 닮음은 ‘문병’을 또 한 번 슬픈 말로 만든다. 병을 묻는 일이란, 이처럼 이중으로 슬픈 일이다. 문병은 두 겹짜리 슬픔이다.

문태준은 이 두 겹의 슬픔을 아는 시인이다. 그의 네 번째 시집에 실린 「문병」이라는 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이 시를, 위에서 말한 이유와 같은 이유에서 슬픈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위와는 다른 이유에서 덜 슬픈 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문병도 슬프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이 문병은 내가 아는 가장 덜 슬픈 문병이다. 시의 내용만 간추려 보자. 우선 화자가 병을 ‘물으러’ 누군가를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병원에 도착해 환자가 있는 병실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간 그 첫 순간, 화자의 눈에 맨 처음 들어오는 광경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그대는 엎질러진 물처럼 누워 살았지” 환자니까 누워 있었을 테고, 누워 있었으니 납작해 보였을 텐데, 심지어 환자복과 병실 침대 시트의 무늬가 똑같아 그가 더욱 납작해 보였겠다. 3차원으로 생생한 이 공간에 2차원처럼 존재하는 환자의 모습을, 그는 “엎질러진 물” 같다고 쓸쓸하게 비유한다. 생이 활기를 잃듯, 환자가 입체감을 잃고 평면으로 전락한 것이다. 화자는, 그런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그저 “보슬비가 다녀갔다”거나 “제비가 돌아왔다”는 실없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떠들어댈 뿐인데, 그마저도 더는 할 수 없게 된다. “초롱꽃 핀 바깥”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일이, 물론 자신은 조금의 악의도 없었다 해도, 병실에 종일 누워만 지내는 환자에게는 그조차 상처가 될 수도 있을까 염려되어서다. 그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그대가 잠시 웃”는 모습을 보고, “밥알 몇 개를/개미 몇이 와 마저 먹는 것”을 본다. 그렇게 계속 본다. 시의 마지막 행은 이렇다. “작은 개미들을 계속 보았지” 그렇게 화자는 그냥 지켜본다. 그저 계속 보기만 한다. 그리고 그 ‘지켜봄’에서 시가 끝난다.

사실 ‘지켜봄’에서 끝난다기보다, 이 시는 ‘지켜봄’ 그 자체다.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계속 지켜만 보다가, 마지막까지 지켜보면서 끝나는 시다. 2행과 3행의 “나는 ~고 말했지”를 제외하면, 이 작품에서 화자가 하는 일은 아픈 이를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렇게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문병인가. 병을 ‘물어야’ 하는데, 환자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기도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의 화자는 저렇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이 문병에는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다. 환자를 붙잡으며 펑펑 울지도 않고, 그의 건강하고 행복했던 과거를 들추어 내며 현재의 아픔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슬프게 쓰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더 슬퍼질 수 있었던 시다. 문병이라는 소재부터가 이 시가 그려낼 슬픔에 대해 미리 어느 정도 각오를 하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가 각오했던 바에 비해 이 시는 좀 ‘덜 슬픈’ 것 같다. 그저 담담하고 건조한 저 어조 때문인가. 내게는 이것이 단순히 문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문병의 메커니즘과 더 관련 있어 보였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내 몇 안되는 문병 경험 중 하나를 꺼낼 필요가 있겠다.

그 문병은 외할머니의 입원 때였다.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친 터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회복을 위해 병원에서 지내고 계셨다. 그때의 상황은 이 시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입원하신 할머니는 정말로 “엎질러진 물” 같았고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 역시 화자처럼 무슨 말을 하기를 그만둔 채, 그저 당신을 계속 보기만 했다. 걱정되고 심란한 가운데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싶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근신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오히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장난도 치고 하며 뻔뻔할 정도로 구셨다. 그때 말을 더 많이 한 쪽은 할머니 쪽이었고 더 많이 웃었던 쪽 역시 당신 쪽이었다. 나는 환자보다 더 조용했고 환자보다 더 울상으로 서 있었다. 할머니는 내 학교 생활을 물었고 오늘 아침밥은 잘 먹고 왔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물었다. 돌이켜 보면 문병을 갔던 건 나였지만 ‘물었던’ 쪽은 오히려 할머니였다. 나는 위로를 드리고 왔어야 할 문병에서 도리어 위로를 받고 온 것이었다. 이 거꾸로 된 문병의 풍경을 나만 경험한 게 아니라고, 저 시는 말하고 있었다. 화자가 “그대는 잠시 웃었지”라고 말할 때 그 웃음은 분명 내가 본 적 있던 웃음이었고, “나는 어렵게 웃으며 보았지”라고 말할 때 그 웃음도 분명 내가 지은 적 있던 웃음이었다. 시인의 문병과 나의 문병은 이처럼 닮아 있었다. 우리의 비슷한 문병은 과연 앞에서 말했듯이 병을 ‘묻는’ 일이었을까?

같은 시인의 다른 시 「가재미」가 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어 보인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라는 무서우리만치 삭막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시도, 문병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우선 “가재미”라는 표현에 눈길이 간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문병」에서 “엎질러진 물”로 표현되었던 것이 이 시에서는 “가재미”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환자는 두 시에서 모두 평면 이미지로 나타난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 나약한 상태라서 그런 걸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가재미」의 마지막 구절은 더욱 놀랍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내가 그녀를 적셔 주는 게 아니고 그녀가 나를 적셔 준다. 암 투병 중인 그녀를 위로해 주기 위해 간 문병에서, 되려 화자가 위로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일어설 수도 없이 가재미처럼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지내는 평면의 환자가, 건강한 화자를 오히려 끌어안는 장면. 건강한 내가 아픈 그녀를 끌어안는 게 아니고,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받기만 했다. 이런 문병도 ‘문병(問病)’일 수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문병」으로 돌아오자. 위로를 주는 쪽은 여기서도 환자 쪽이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나”가 아픈 “그대”에게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니라 그 반대. “그대”가 “나”를 위로하고 있다. 이 역전은 다음 문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대가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으므로” 이 부분에서도 마찬가지, 손을 잡아주는 일은 문병객이 환자에게 해 주어야 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대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대가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것’이란다. 그렇다면 문병의 ‘문’ 자를 ‘물을 문(問)’ 자가 아니라 ‘들을 문(聞)’ 자로 써 보는 건 어떨까. 묻는다는 것은 준다는 것이다. 문병 갈 때 주로 사 가곤 하는 음료수나 과일만 주는 것이 아니고, 진심을 다해 걱정해 주거나 위로해 주거나 얼른 낫기를 기도해 주거나 하는 것도 다 ‘주는 것’이다. 문병이 병을 ‘물으러’ 가는 일일 때, 우리는 환자에게 이런 것들을 ‘주고’ 온다. 건강한 이가 주고 아픈 이가 받는다. 반면 듣는다는 것은 받는다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는 일과도 같다. 듣거나 바라보는 것이지, 묻는 것이 아니다. 몇 달 전 나의 문병이 그랬고, 문태준의 「문병」이 그랬듯, 어떤 문병은 주는 것만이 아니라 이러한 ‘받는 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아픈 이가 주고 건강한 이가 받는다. 위로를 받는 쪽은 오히려 문병을 간 내 쪽이다. 걱정을 받는 쪽도, 기도를 받는 쪽도 내 쪽이다. 문병이 병을 ‘들으러’ 가는 일일 때는, 도리어 우리가 환자에게 ‘받고’ 온다. 이처럼 문병(問病)이 문병(聞病)이 될 때, 문병의 풍경은 사뭇 달라질 수 있다.





0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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