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번째 책)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2012)
시집 제목은 이상할수록 좋다. 그 안에 수록된 시도 이상하다면 더 좋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까지 그 이상함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요컨대 평범하게 아름답기보다 비범하게 이상해지기를 택할 때, 시는 언어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감동을 준다. 진심으로 나는 시의 이상함을 사랑한다. 충분히 이상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고까지 말할 의향이 있다. 내 눈에는 평범하고 이상하지 않은 시야말로 이상하다.
황인찬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는 내가 아는 가장 이상한 시집 중 하나다. 여기에는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시가 하나도 없다. 어떤 시든 다 읽고 난 뒤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을 수차례 반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곰곰이 시를 곱씹느라 이 짧은 책을 하루 종일 붙잡고 있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이 시집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때가 온다.
이 이상한 시인이 하는 일을 보라. 그가 자신의 첫 시집에서 하는 일은 딱 하나, "구관조"를 "씻기는" 일이다. 표제작을 들여다보니 이런 문장이 보인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구관조 씻기기」 중) 이 시에 따르면 새는 씻길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구관조를 씻긴다. 이것은 뭐랄까, 우리는 시 없이도 잘 살 수 있지만 시인이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들은 굳이 시를 쓰면서 살아간다는 사실과 닮아 있다.
새를 씻길 필요가 없듯이 언어도 씻길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런대로 쓸 만하고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의 언어에 만족할 수 없다면, 굳이 언어를 씻겨 새롭게 만들고 싶다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보다 정확한 새 언어를 원한다면, 당신은 시인이 될 자격을 이미 갖춘 것이다. 김행숙 시인은 이 시집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언어에게 옷을 입히는 방식이 아니라 언어를 씻기는 방식을 통해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적 경험을 제공한다." 시인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신만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고들 말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씻길 필요가 없는 '언어'라는 한 마리 새를 씻기는 사람이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언어를 씻기는 중이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자신만의 언어를 갖게 되고, 그들이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때마다 우리 언어의 지평은 넓어지거나 더 심하게 말하면 전복된다. 황인찬의 첫 시집이 해낸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번 글에서는 그가 언어를 어떤 방식으로 씻기고 있는지 살펴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가 언어를 씻기는 방법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당연하지 않은 것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 시치미 떼거나, 당연한 것을 두고 당연하지 않다는 듯 새삼스러워 하거나.
그의 시는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당연하게 일어나는 이상한 장소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부터가 우선은 이상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연하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 또 한 번 이상하다. '비현실의 현실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현상은 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유독 그것이 강하게 나타나는 시가 있어 아래에 옮긴다.
냉장고에 붙여 놓은 자석이 힘없이 떨어졌다 눈을 껌뻑이는 거북이가 수조 밖에 나와 있었다 그것을 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어
그렇게 생각했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베란다의 바닥이 젖어 있었다 상관하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누가 앉았다 간 것처럼 따뜻했는데
구독하지 않는 석간신문이 테이블 위에 있었고
이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돌이킬 수 없다는 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야
집에 돌아왔는데, 여기서는 아무도 비참하지 않았다
침실에 들어서자 잎이 무성한 선인장이 있었다
-38면, 「면역」 전문
이 시가 그리고 있는 부조리한 풍경들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불가능이다.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베란다의 바닥이 젖"어 있을 수는 없고, "구독하지 않는 석간신문이 테이블 위에 있"을 수도 없으며, "잎이 무성한 선인장이 있"을 수도 없다. 이러한 불가능의 묘사가 지적하는 것은 이 세계와 우리의 언어가 결코 일 대 일로 대응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일 텐데, 다시 말해 이는 언어가 모든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만능의 도구는 아니라는 점과 관련 있다. 모든 것을 꿰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아내는 방패를 팔던 사기꾼이 있었고, 누군가 그에게 그 창과 방패를 서로 부딪히면 어떻게 되느냐 묻자 결국 대답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는 그 유명한 '모순(矛盾)' 설화를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최고의 창과 최고의 방패가 만나는 그 '모순'의 지점을 언어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표현할 수 없다 뿐이지 그 '모순'은 엄연히 존재한다. 따라서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의 언어로는 붙잡을 수 없는 어떤 진실을, 그저 '모순'이라고 부르는 데에 그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언어 너머의 공간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황인찬의 시적 방법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모순'의 벽을 끊임없이 두드린다는 데에 있다. 그의 시선은 말할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이해될 수 없는 것을 향한다. 그래서 그의 언어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주목하는 것이다. "말린 과일은 뜨거운 물속에서도 말린 과일로 남는다"(「건조과」 중)에서처럼, 그리고 "떠난 적도 없는데 왼쪽이 돌아왔다"(「너와 함께」 중)에서처럼, 혹은 "보이지 않는 어둠이 계속 보이고 있다"(「장막의 뒤에서 자꾸」 중)에서처럼. 그는 당연하지 않은 사실들을 당연한 언어 안에 담는다. 그렇게 그가 자꾸만 모순을 말하는 것은,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에 닿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싶은 염원의 발로다. 즉, 당연하지 않은 말들을 당연하게 나열하면서 그가 얻으려 하는 것은 하나, 바로 불가능의 가능성인 셈이다.
그러나 진정 이 시인의 특기는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말하는 것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말하는 데 있다. 모순 앞에서 우리는 쉽게 방어적이 된다. 그러나 당연한 사실 앞에서는 쉽게 방심한다. 그런 면에서 이 시인은 어떠한 자명함 앞에서도 방심하지 않을 줄 아는 시인이다. 앞에서 그는 모든 모순들에게 자명성을 부여했지만 이번에는 그 자명성을 다시 해체하고 있다.
그것을 생각하자 그것이 사라졌다
성경을 읽다가
다 옳다고 느꼈다
예쁜 것이 예뻐 보인다
비극이 슬퍼서
희극이 웃기다
좋은 것이 좋다
따뜻한 옷의 따뜻함을 느낀다
컵 속의 물을 본다
투명한 빛이 바닥에 출렁인다
그것은 마시라고 있는 것
-83면, 「그것」 전문
황당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문장들이라고 느꼈다면, 이 시를 제대로 읽었다는 뜻이다. "예쁜 것이 예뻐 보"이고, "좋은 것이 좋다"는, 이 동어반복의 무의미한 문장들이 획득하는 것은 '어색함'이다. 저 당연한 말들이 시의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의 자명함을 의심하게 된다. 눈을 비비며 시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고, 내가 놓친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될 텐데, "비극이 슬"프고 "희극이 웃기다"는 말들의 자명함은 그렇게 해체된다.
이것은 가장 당연한 말들이 만들어내는 가장 낯선 분위기다. 신기하고 놀라운 것으로써 낯섦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익숙하고 당연한 것으로부터 낯섦을 잉태하는, 정반대의 방식도 존재한다. 황인찬이 이 시집에서 능숙하게 선보이는 방식은 바로 후자의 방식이다. "체리 한 알 집어삼킨다 체리를 씹으면 체리 맛이 난다"(「X」 중)에서처럼, 그리고 "어떤 파에는 어떤 파꽃이 매달리게 되어 있다"(「발화」 중)에서처럼, 혹은 "눈이 부셔서/눈을 감았다"(「서클라인」 중)에서처럼. 당연한 말을 곰곰이 곱씹다가 어느새 그 말들이 더 이상 당연해 보이지 않는 순간에, 황인찬 시의 '시적인 것'은 비로소 발생한다. '일상적인 것'에서 탈피한 '시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것' 한가운데에서 역설적으로 피어나는 '시적인 것'이다.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104면, 「무화과 숲」 전문
마지막으로 한 편 더 읽으며 마무리하자. 아마도 그의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일 「무화과 숲」도 역시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쓴 결과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고 "아침에는/아침을 먹"는 것이 당연한 거라면,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대단한 "꿈"처럼 보이고,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일이 당연하지 않아 보일 때, 이 시는 우리를 중요한 곳으로 데려간다. 당연하게 해 왔던 사랑이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지점, 눈을 씻고 봐야 제대로 보이는 그곳에서 그는 구관조를 씻기고 언어를 씻기고 사랑을 씻긴다. 세계는 그렇게 씻겨나간다. 다시 한번 김행숙 시인의 말을 인용하며 마친다. "그에게 '낯설게 하기'는 기법이 아니라 세계다."
0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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