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번째 책)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2001)
많은 시인들이 시에 대한 시를 쓴다. 한 편의 시가 주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무한할 텐데, 이때 시 자체도 예외는 아니다. 시인의 관심사가 시에 반영되는 것이니만큼 시인이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예삿일은 아닐 것이다. 실로 많은 시집에서 그러한 자기인식적인 시가 발견된다. 그럴 때 시인은 스스로 타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시에 대해 사유할 때 시인은 시가 무엇이고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된다. 나희덕의 네 번째 시집에도 이 같은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축음기의 역사」라는 시를 읽어 보면, 우리는 그가 시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다.
저 낡은 소리는
어떤 상처를 읽은 것이다
바늘은
소리가 남긴 기억을
그 만져지지 않는 길을
천천히 되밟으며 지나간다
아무리 여러번 읽어도
상처의 길은
더 깊게 패이거나 덧나지 않는다
닳아가는 것은
그것을 읽는 바늘끝일 뿐
저 소리로는
저 소리만으로는
스스로 暗電될 수 없어
소리를 기록할 수 있다고 믿게 된 때부터
상처를 반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 때부터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소리가 태어난 침묵 속으로
-「축음기의 역사」 전문
인류에게 언어가 없던 시절, 그때에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 “소리”들만이 난무했을 거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 “소리”들은 ‘말’이 되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짐승의 울음 같은 어떤 소리값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발신은 가능하지만 수신은 불가능한 소리들. 그 지극한 날 것의 “소리”들은 우리가 언어를 발명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전달’되기 시작했다. 언어가 어떤 감정을, 어떤 사물을, 혹은 어떤 진실을 포착하고 표현할 수 있게 해 주면서, 우리는 손에 잡을 수 없던 것들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소리를 기계적 진동으로 바꾸어 원판에 홈을 파 기록하는 “축음기”의 일은, 시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시의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현실을 언어로 바꾸어 텍스트로 기록하는 일이다. 2연에서처럼 축음기의 바늘이 “소리가 남긴 기억”을 “되밟”는다면, 시의 언어는 ‘시인의 기억’을 되밟음으로써 현실을 ‘축음’(녹음) 한다. 그리하여 시는 축음기가 소리를 “기록” 하듯, 현실을 기록할 수 있다. 따라서 축음기가 재생하는 소리가 “어떤 상처를 읽은 것”이라는 말은, 시인이 쓰는 시가 현실의 “상처”를 받아 적는 일임을 말한다. 사물과 존재의 실상이 어둠이며 세계가 비극적인 곳이라고 인식하는 나희덕 시의 일반적인 특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축음기의 기록은 원래 것의 완벽한 재현은 아니다. 손실이 있거나 잡음이 포함되거나 일부 변형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데, 이것은 1연에서 “저 낡은 소리”로써 표현되고 있다. 애초에 존재했던 소리가 축음기를 거치는 순간 필연적으로 “낡”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이 언어로 기록될 때에도 이와 똑같은 현상을 겪는다. 언어가 있음으로 인해 우리는 사물을 묘사하고 생각을 표현하게 되었지만, 어떤 언어로도 사물을, 혹은 생각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다. 축음기가 지닌 한계와 동일한 한계가, 언어에도 있는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언어가 위대한 발명품이기는 하나 완벽한 발명품은 아니라는 데 있다. 손실 없는 번역이 없듯, 언어로 변환되는 순간 반드시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고, 이는 축음기 역시 마찬가지다. 축음기가 내는 소리가 “낡은 소리”라면, 같은 이유로 우리가 하는 말 역시 ‘낡은 말’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진짜 소리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는 “축음기”와 진짜 현실(혹은 진실)을 정확히 전달할 수 없는 ‘시’는 같은 층위에서 만난다. 축음기가 소리에 있어 무력할 때, 시는 언어에 있어 무력하다. 따라서 2연에서 레코드판에 파여 기록된 홈을 “그 만져지지 않는 길”이라고 쓴 것은 녹음된 소리의 재생이 원래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겠거니와, 언어로 구성된 한 편의 시가 시인이 기록하려 했던 어떤 진실과 완벽히 일치할 수 없다는 점과도 연관 지을 수 있어 보인다.
정리하면 이렇다. “축음기”가 “소리”를 기록할 때, 이 축음기는 반드시 어떤 불가능에 부딪힌다. 이는 ‘언어’가 ‘현실’을 기록할 때, 한 편의 시가 어떤 불가능을 맞닥뜨리는 것과 동일하다. 그것은 “소리”가 “암전(暗電)”되는 과정에서의 불가능이다. 언어는 암호다. 이때 완벽한 암호화도, 그 암호의 완벽한 해독도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성을 매개로 축음기의 역사는 언어의 역사가 된다. 이 불가능성은 3연에서 더욱 커진다. 안 그래도 부정확한 우리의 ‘언어’는 심지어 계속 쓰면 닳는다. “닳아가는 것은/그것을 읽는 바늘끝일 뿐”에서 지적하듯, 안 그래도 부정확한 축음기의 소리는 자꾸 재생할수록 더욱 부정확해지는 것이다. 이미 “낡은 소리”였지만 바늘이 닳아 가며 ‘더 낡은 소리’가 될 것이다. 이것은 축음기의 비애이자 시(인)의 비애이고 언어의 비애다. 어떤 언어가 너무 많이 사용되어 관습화되면, 그것이 성글게나마 품고 있던 진실의 어느 측면조차 더는 품을 수 없게 된다.
축음기-언어의 불가능성 앞에 무력해진 시인은 차라리 ‘언어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소리가 태어난 침묵”으로 표현되는 그 태초의 세계를 시인은 “상처를 반복할 수” 없던 세계로 본다. 언어가 없던 때에는 세계의 “상처”를 기록할 수도, 다시 읽어낼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연의 마지막 두 행은 축음기가 발명되기 전의 세계가 차라리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하는 시인의 한탄으로 들린다. 인류가 언어를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축복이 아니라 미심쩍은 불행일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어쩌면 시인 나희덕의 일은 언어를 ‘다루는’ 일이 아니라 언어와 ‘싸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의 불완전한 언어가 오래된 “축음기”처럼 “낡은 소리”를 낼 때, 끊임없이 언어를 쇄신하여 그 불가능의 크기를 줄이는 일이 곧 시인의 일이 아닐까. 1877년 에디슨에 의해 최초로 발명된 축음기는, 이제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소리를 낸다. 현실을 녹음하는 언어의 음질(音質)도 시인들에 의해 그만큼 깨끗하고 정확해질 것이다.
06.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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