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번째 책) 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2003)
한 번 읽었을 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보인다. 어떤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는 당사자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쯤은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읽었을 때는 극복될 수 없는 죽음도 보인다. 죽음은 언제나 전능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몇 번을 더 곱씹다 보면 그제서야 무능한 언어가 보인다. 우리가 언어 앞에서 무력한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 앞에서 무력한 것이라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지점이 존재하고, 어떤 언어도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끝내 비정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렇게 사랑과 죽음과 언어 때문에 이 소설 속 세계는 폐허가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원받고자 글 쓰는 일을 멈출 수 없는 한 '에세이스트'가 있다.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가 ‘순수 예술’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유명하다. "모든 예술은 음악을 동경한다." 이 소설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필요가 있다면(물론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발레리의 저 말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소설 속 언어들은 음악이 되기를 바랐으나 끝내 음악이 되지 못한, 일종의 잔해에 불과한가. 그렇게 말한다면 모든 문학이 음악에 열등감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일이 되므로 위험하다. 이 소설은 왜 「작곡가의 책상」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책상」인지를 해명하는 과정 속에 해답이 있을 텐데, 내가 이해한 바는 다음과 같다. 누군가는 글쓰기의 결과물로써 ‘글’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글을 쓴다는 행위, 혹은 글을 쓰는 순간으로서의 ‘글쓰기’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다시 말해 이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쓰는지는 관심이 없고 오직 쓴다는 행위만을 위해서 쓴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졌다. 우리가 음악으로만 대화했다면 일은 다르게 진행되었을지도 몰랐다. (…중략…) M이 나에게 말한 대로,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144~145면
언어는 소통 수단으로서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고, 사유의 한 방식으로서도 존재한다. 따라서 불완전한 언어를 매개로 해서는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위의 인용문은 전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크게 와닿지 않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갑자기 치명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사랑을 할 때다. 한국인인 ‘나’와 독일인인 ‘M’ 사이에서 이와 같은 언어의 장벽은 추상적인 한계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불가능으로 빚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내가 M과 서로 다른 자국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졌다.”(87면) 이들은 언어의 불가능 때문에 사랑의 불가능에 부딪혔으나, 그것은 단순히 소통의 불가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교감의 불가능이자 이해의 불가능이고, 더 나아가 존재론적인 불가능이었다. 이들 사이에 '언어'가 아니라 '음악'이 매개가 되어 주었다면,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절대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은 대개 죽음이라고 불리며, 그 장소는 방향을 분간할 수조차 없이 황량한 곳이며, 이름 없는 존재로 수용되는 것이며, 수백만 중의 결코 구별되지 않는 하나로 소멸하는 경우이며, 혹은 설사 아주 다른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최소한 죽음과 아주 닮은 어떤 것이 된다.
-75면
불가능한 것은 또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죽음인데, 위의 인용문이 잘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처음으로 들어보았던 성악 교향곡을 인상적으로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훗날 나는 그것들의 테마가 단지 하나, 죽음, 그것의 전능을 인정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10면) 이보다 정확한 말은 없을 것 같다. "죽음, 그것의 전능을 인정함"이라니. 죽음이 전능하다면 죽음 앞에 우리는 전적으로 무능하다.
이렇게 소설은 우리를 세 가지 불가능 앞에 데려다 놓는다. 사랑의 불가능과 죽음의 불가능과 언어의 불가능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사랑과 죽음과 언어에 있어 모두 무능한 '나'가 택한 길은 다음과 같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케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
-174면
무엇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되, 그렇다고 쓰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작가의 운명이다. 이들에게 '음악'은 하나의 언어, 그것도 아주 절대적인 언어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이에게 '음악'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음악만이 글을 쓰는 작가(에세이스트)에게는 궁극의 언어가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처럼 M과 '나'가 '언어'가 아니라 '음악'으로 대화했더라면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희망이다. 사랑과 죽음과 언어는 모두 하나의 지점, 바로 '불가능'이라는 동일한 층위에서 만나며, 그 불가능의 다른 이름이 '음악'이다.
그런 점에서 위 인용문은 소설의 핵심을 안고 있다. 이 에세이스트는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 쓴다. 방점은 반드시 '쓰다'라는 동사에 찍혀야만 한다. 끝내 불가능에 봉착한다고 해도, 그 불가능을 향해 가는 과정만큼은 불가능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알쏭달쏭 한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해도 좋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코기토는, 세상의 모든 '에세이스트'들에게 이렇게 변형되어 말해질 것이다. "나는 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소설은, 오직 글쓰기를 통해서만 제 존재를 확인받는, 바로 저 '작가적 코기토'의 소유자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다.
06.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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