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평연습 Jul 05. 2022

하루키의 상상은 이제 밖으로 나가야 한다.

#63번째 책)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2017)


한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덩이에서 종이 울리고, 그림 속에서는 기사단장이 튀어나와 말을 건다. 얼굴 없는 남자가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하며, 꿈속에서 이루어진 사정으로 (전) 아내가 임신한다. 그렇다, 두말할 것도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열성적인 마니아가 유독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꼭 그의 소설을 전부 읽어보지 않은 분들이라도 쉽게 하루키의 솜씨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에 특정한 표식을 남긴다. 몇 가지만 말해 볼까.

예컨대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언제나 음악에 해박하다. 주인공이 레코드판에 클래식 음반을 올리며 고전음악에 관한 현학적인 독백을 펼치는 것은 그의 장편소설에서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다. 또 술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도 위스키를 대단히 사랑하는 것으로 알려진 하루키는 주인공이 꼭 다른 인물과 위스키에 관해 해박한 대화를 나누어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보다. 이 외에도 현학적인 포즈로 위장한 인물들의 시니컬한 대화나 과연 이야기에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 의문인 불륜 섹스 장면들이 또한 그렇다. 중요한 여성 인물을 묘사할 때 자꾸만 가슴의 크기와 모양 따위를 언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런 게 과연 꼭 필요한가. 그러나 이런 ‘표식’들은 자꾸만 반복된다.

이들은 하루키의 소설을 하루키답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겠지만 하루키의 소설이 다른 무엇일 수 없게 만드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은 『1Q84』(2009)의 '덴고'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의 주인공과 조금도 다른 사람 같지가 않다. 이들은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이상한 상황에 휘말려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를 두고 이른바 '하루키스트'라고도 불리는 그의 팬들은 이것이야말로 '하루키 스타일'이라며 변호할지 모르나 이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습관’이다. 내게는 차라리 상상력의 고갈로 보인다.

그의 상상력은 물론 대단하다. 이 장대한 이야기를 지탱하는 것은 소설의 플롯이나 문장력이기 이전에 우선은 풍부한 상상력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루키의 상상력은 자신이 일찌감치 만들어 놓은 서사적 구조 안에서만 작동하는 상상력이다. 이 말은 곧바로 두 개의 추가 질문을 유발할 텐데, 먼저 그가 '일찌감치 만들어 놓은 서사 구조'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구조의 '안에서만 작동하는 상상력'이란 게 무엇인지가 바로 그것이겠다.

먼저 하루키식 '구조'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본의 문학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그의 소설을 두고 "구조밖에 없다"고 말한다. 어떤 구조인가. 먼저 주인공 앞에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다던가 그림 속의 기사단장이 살아 나타난다던가 하며. 이 판타지는 충분한 설명 없이, 마땅한 논리 없이 선제시된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이 갑작스럽게 닥친 거대한 미스터리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동시에, 언제나 그 특유의 '쿨함'을 잃지 않고 이성적인 대응책을 찾는다. 그러나 주인공 앞에 닥친 마법적인 미스터리는 항상 개인을 압도하는 바, 따라서 다음과 같은 대결 구도가 형성된다. 개인-세계, 현실-비현실, 논리-비논리. 이때 앞의 것은 뒤의 것에 나름대로 대항해 보지만 늘 힘에 부친다. 말하자면 하루키 소설에서 개인은 세계에 압도당하고, 현실은 비현실에 의해 조롱당하며, 논리를 비논리가 집어삼킨다. 그의 소설에서 대부분의 미스터리가 끝내 현실적/논리적으로 해명되지 못한 채 이야기가 끝난다는 점 역시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하루키 소설의 ‘구조’는 역대 대부분의 장편소설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가장 최근작인 『기사단장 죽이기』도 안의 내용은 달라졌을지언정 이전과 동일한 구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소설 쓰는 일을 집 짓는 일로 이해한다면, 이는 새로운 집을 짓지 못하는 건축가와 같다. 소재와 내부 인테리어만 바꿨을 뿐 기존의 뼈대와 설계상의 골격을 거의 그대로 재사용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은 실용적인 면에서 새 집이 될 수는 있어도 예술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재미를 주는 일이 물론 소설이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한 편의 소설에서 발생하는 ‘문학적인 것’은 인식의 깊이에서 오는 것이지 재미의 폭에서 오지 않는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폭넓게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어딘가 깊은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지는 않는다.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잘 꾸며진 집이지만, 그 안에서 살고 싶어지지는 않는 집. 그의 건축이 예술이 되려거든, 인테리어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기둥부터 새로 세워야 한다. 구조 안에서 상상하지 말고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것. 하루키의 상상은 이제 밖으로 나가야 한다.



07.05.22.

작가의 이전글 좋은 시집과 만나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