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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Jul 07. 2022

사랑은 부조리한 교환.

#64번째 책)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 현대문학(2018)


오랜만에 김금희의 소설을 읽었다. 그가 누구인가. 최근 한국 문단에서 가장 신뢰받는 젊은 작가 중 한 명이 아닌가. 특히 연애 소설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 신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녀에게 연애 소설을 잘 쓴다고 칭찬하는 것은 실례일지 모른다. 그녀는 그냥 소설을 잘 쓴다. 그녀의 그 숱한 '잘 쓴 소설'들을 읽고 있자면, 나는 소설가도 아니면서 얼마간 질투가 일기도 한다. 만약 소설을 쓴다면 '그녀처럼' 쓰고 싶다고.

이번에 읽은 것은 장편 『나의 사랑, 매기』다. 앞에서 연애 소설을 운운한 것은 이 작품이 연애 소설이기 때문. 그녀는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게 뭔지 확실히 보여줬다. 덕분에 이 처연하고 애절한 연애 소설을 읽으며, '사랑'에 관해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자크 라캉이 사랑이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그것을 원하지 않는 이에게 주는 것'이라고 전한 사례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아포리즘의 깊고 섬세한 의미를 다 알기는 어려우나, 거칠게 요약해 본다면 사랑이란 결국 '부조리한 교환'이 아닐까. 세상에는 교환 아닌 것이 별로 없으므로 사랑도 두 사람 사이의 일종의 교환이라 본다면, 그때의 '교환'은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교환의 법칙'이 성립되지 않는, 부조리한 교환이다. 특히 이 소설은, 사랑이 어떠한 교환 논리 위에서 펼쳐지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는, 소설 『나의 사랑, 매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의 세 가지 부조리한 교환 법칙에 대해 써 본다.


(이 글은 신형철의 <시를 통해 본 사랑의 수학>이라는 글에서 그 형식과 아이디어를 빌려 왔음을 밝혀 둔다.)






1. 반드시 한 쪽은 손해를 본다.


본디 교환이란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무엇을? 동등한 것을. 우리가 육천 원을 내고 도시락을 사 먹는다면 그 도시락의 가치가 육천 원이라는 화폐 가치와 동등하다는 뜻이고, 큰맘 먹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려면 그것과 동등한 수준을 맞추기 위해 십만 원 혹은 그 이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무언가를 받으려면, 이쪽에서도 그것과 동등한 무엇을 내줘야 한다는 것. 당연하다. 상식적인 교환의 논리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사랑에서는, 완벽한 동등함이란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듯, 언제나 기울어진 교환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더 사랑하고 반드시 누군가는 덜 사랑하므로, 이 교환은 전혀 동등하지가 않다. 사랑의 논리에서는 육천 원만 내고도 레스토랑을 이용하거나 십만 원을 지불해도 도시락밖에는 못 먹는,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나한테 별명을 지어줘. 그게 입에 붙으면 너가 누구랑 있을 때 내 전화를 받아도 괜찮을 것 같으니까."

-35면


우리의 주인공 '안재훈'은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그녀가 유부녀고 자신과 불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녀 쪽 가족들에게 들킬 만한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밤과 주말에는 연락하지 않기, 전화번호를 실명으로 저장하지 않기, SNS에 서로와 관련된 어떤 내용도 올리지 않기와 같은 만남의 '룰'을 만들었고, '이름 부르지 않기' 역시 그 룰 중 하나가 된다. 이제 그는 그녀를 '매기'라 부른다(부를 수밖에 없다).


매기가 그런 규칙들을 늘리면 늘릴수록 나는 비참해져갔는데 매기는 그렇게 무너져가는 내 마음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인지, 그래도 둘 중 하나는 악역을 맡아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런 상태를 감안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매기가 그쯤 이야기했을 때부터 위태로워지던 상황이었다. 그런 규칙들 속에 이 관계에 대한 은폐의 기도가 온통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34면


왜 이런 규칙들이 필요한지는 물론 잘 알지만, 그래도 속상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재훈은 매기가 너무 냉정하고 계산적이라는 생각을 할 테지만 매기에게는 그런 재훈이 철없어 보일 뿐이다. 이 둘은 철저하게 어긋나면서 서로 동등해질 수 없게 된다. 이 어긋남의 결과로 둘 사이에는 어떤 미묘한 격차가 발생할 텐데, 이 때문에 누군가는 자신이 상대에게 준 만큼에 훨씬 못 미치는 만큼을 되돌려 받는다. 한쪽(매기)은 현실적인 사랑을 할 때 다른 쪽(재훈)은 현실을 뛰어넘은 사랑을 원하기 때문에, 둘 사이는 비극적으로 기울어진다. 그리고 언제나 더 사랑하는 쪽은 손해를 본다.


우리는 함께 사진도 찍지 않았다. 둘이서 다정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는 일, 그것이 아무리 기계의 눈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렇게 제삼의 눈을 바라보는 게 차마 못할 일이었다. (…)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서 몇 장 넘겨 보다가 하지만 셀피 한 장 남기는 일마저 두려워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감당한다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리움을 느끼는 동시에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63~64면


이 떳떳하지 못한 사랑의 관계자들은 함께 사진 한 장 찍지 못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진을 찍지 못한다는 그 사실보다,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그 사실을 누가 더 괴로워하는지에 있다. 인용된 장면을 읽어 보면 그런 괴로움의 몫은 매기보다는 재훈 쪽에 있는 듯한데, 그러고 보면 싸우고 나서 먼저 전화해 사과를 건네는 쪽도, 같은 상황을 겪고 상처를 더 많이 받는 쪽도 재훈이다. 그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한다. 결과적으로 상대를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재훈이라는 뜻이겠다. 그러니 그가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애인이 되어 제주에서 날아올 매기를 기다렸다가 매기는 날개를 먹지 않으니까 그건 내가 먹고 저녁이면 한강으로 나가서 반보씩 간격을 두고 산책 아닌 산책을 함께하고 매기가 가고 나면 조용히 그 일급비밀의 메신저가 울리기를 기다리면서.

-109~110면


상대의 입맛에 내가 맞추고, 상대의 스케줄에 따라 생활하고, 상대가 없을 때는 상대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애인". 자존심도 체면도 없지만 그 소박한 애인도 애인이니까, 그런 사랑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어떤 것도 상관없다는 식의 저 무조건의 사랑. 아주 작은 사랑의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 내 전부를 내줘도 좋다는, 이건 그러니까 극도로 불평등한 교환이다. 사랑은 가끔 이런 식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이렇게 치명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계속 사랑하는 것이다(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준 사람은 있고 받은 사람은 없다.


사랑은 과연 축적되는가. 그것은 아무리 받아도 늘지 않고 아무리 줘도 줄지 않는 것일 텐데, 아마 이는 사랑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교환은 무한정 주기만 하거나 무한정 받기만 할 수도 있다. 주기만 하는, 혹은 받기만 하는 교환이라니. 그래도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제 자신의 지위를 인식할 수 있다면, 이런 교환은 차라리 덜 비극적이다. 문제는 사랑을 준 적 없는데 누군가는 받는 일이, 혹은 사랑을 열심히 줘도 그것을 상대가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2002년, 산소 학번이라는 낯간지러운 애칭으로 불리며 대학에 들어왔을 때 야구모자를 쓰고 신입생 환영회에 나타난 매기는 자기소개를 아주 간단히 "구로 살아요"라고 했다. 그런 시들한 자기소개는 그러나 어쩐지 내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는데, 나는 막 대구에서 올라와 그때 그 구로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슴아슴했기 때문이었다.

-67면


재훈은 매기의 첫인상을 위와 같이 기억한다. 신입생 환영회에 나타나 모든 게 귀찮다는 '쿨'한 태도로 툭 내뱉은 자기소개. 재훈은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고 말한다. 첫눈에 반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가 마음속으로 훅 들어온 순간인 건 맞을 것이다. 정작 매기 쪽에서는 아무런 의도도 감정도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비슷한 장면은 얼마든지 더 있다.


전라도 출신인 매기는 정육점을 언제나 식육점이라고 했다. 정육보다는 식육이 먹는 행위에 가깝다고, 고기를 정미한다는 말에는 미화(美化)의 음모가 있다고 해서 나를 뻑가게 했다.

-10면


저 말을 매기 스스로도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정육'이 아니라 '식육'이어야 한다고, 고기를 먹는 행위를 미화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그녀는 실은 별생각도 없이 말했을 터지만 재훈은 이 말들에 '뻑갔다'고 고백한다. 앞의 "구로 살아요"와 "식육점"이라는 말에서, 재훈은 사랑을 느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사랑은 누구도 준 적 없는 사랑이다. 준 사람은 없지만 받은 사람은 있다고? 사랑은 누군가로부터 건네받을 수도 있지만 이처럼 홀로 빚어낼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자신의 사랑이 '홀로 빚어낸' 사랑이라면, 누구든 그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사랑과 드잡이해야 할 것이다.


내가 10000원짜리 복국을 주문하려고 하자 자꾸 18000원짜리 밀복국을 먹으라고 했다.
"이왕이면 좋은 걸 먹어, 좋은 복국을 먹어, 재훈아."
하지만 나는 매기를 만나면서도 돈 문제에는 민감했고 기분이다 싶어서 돈을 함부로 쓰거나 하지 않고 원칙을 지켰으므로 매기의 말을 듣지 않았다. (…)

-100~101면


반대의 경우도 있다. 준 사람은 있지만 받은 사람은 없는 경우. 후반부의 '복국집' 에피소드가 여기에 해당한다. 유명한 복국집까지 가서 왜 좋은 밀복국을 먹지 않느냐고 나무라는 매기가 재훈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다. "나는 당황스럽고 떨떠름했지만 다른 얘기도 하니고 그냥 그 좋은 밀복국을 안 먹느냐는 것이니까 좋게 넘어가려고 노력했다."(101면)

그러나 끝내 비싼 밀복국을 먹지 않은 재훈은 그것이 매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 표현 중 하나였음을 알지 못했다. 자기는 그런 유명한 복국집에서 '회덮밥'이나 먹었으면서, 자신에게는 비싼 밀복국을 먹으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재훈은 뒤늦게 알게 되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사랑은 물론 주고받을 수 있지만 준다고 해서 다 받아들여진다는 보장은 없다. 심지어는 누군가 자신에게 사랑을 건넨 적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수 있다.


그러자 그런 밤이란 매기에게 아주 나빴으리라는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도 매기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아무도 밀복국을 먹어주지도 않았고.

-102~103면


밀복국을 먹지 않아서 8000원을 아꼈지만, 그로 인해 재훈은 과연 얼마나 많은 걸 잃었나. 준 사람은 있으나 받은 사람은 없어서 어딘가에 외롭게 버려지고 말았을 그 사랑. 이는 흡사 누군가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쓰지도 않을 물이 계속 흘러나와 낭비되고 있는 모습 같다.






3. 마음대로 관둘 수 없다.


그런데 사랑이 정말로 이런 거라면, 안 하면 그만 아닌가. 바보도 아니고 왜 이런 부조리함을 구태여 감당해야 하는가. 그만둘 순 없는 걸까. 그러나 이 교환의 부조리함을 가장 결정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원할 때 시작하거나 임의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사랑은 우리 이성을 간단히 압도하는 힘으로 부조리한 교환을 밀어붙인다. 그것은 제 마음대로 시작되고, 결코 우리 마음대로 끝나 주지 않는다.


매기를 사랑하고 나서 줄곧 나를 붙잡았던 의문은 왜 내가 이런 관계를 선택했는가, 였다. 그런데 적어도 9호선에 몸을 구겨 넣고 만원의 상태를 견디며 바닥과, 그 바닥의 깊음과, 그래서 겪는 불편과 고통과 힘듦과 귀찮음 모두의 원인인 한강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매기와 나의 관계에서 선택이란 가능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빗물이 손바닥을 적시듯 매기가 내 인생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는.

-60면


위 재훈의 말대로 사랑이 시작됨에 있어 우리는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미 사랑이 시작된 이후라면 선택의 여지는 더더욱 없다. 그렇다면 사랑은 나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교환이 아닌 것이다. 차라리 사랑의 의지로 내가 동원된 것에 가깝다. 말하자면 사랑이 머리, 우리는 꼬리다. 그것이 시키는 대로, 그것이 가는 대로 끌려다닐 운명이다.


나는 우리가 자꾸 어긋나고 상대를 향한 모멸의 흔적을 남기게 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고 매기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냥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숙명처럼 가져갈 수밖에 없었던 슬픔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했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

-112~113면


눈에 띄는 문장이 있다. "숙명처럼 가져갈 수밖에 없었던 슬픔". '숙명'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을, 사랑의 기본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권희철 평론가의 문장은 정확하다. "사랑은 조화될 수 없는 두 경향이 교차하는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상화하기보다 그런 상황에 감염되어 사랑 그 자체가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것이 된다."(작품해설, 130면)






그러나 우리의 결론은 좀 더 희망적이었으면 좋겠다. 사랑은 실패하기도 하나 성공하기도 한다. 그것으로 인해 숙명적인 슬픔에 빠질 수도 있지만 둘도 없는 행복을 누릴 수도 있지 않나. 사랑은 슬픈 것이라고 단정 짓기도, 행복한 일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다만 부조리할 뿐이다. 하지만 재훈의 말대로,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쯤에서 권희철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하자.


그것은 차라리 사랑처럼 오래 실천된 신비화된 전략으로도 정상화할 수 없는,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방황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라는 점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 바로 그 생을 충분히 겪어내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어떻게 하면 방황과 혼란을 피할 수 있는가가 아니고, 피할 수 없는 방황과 혼란을 어떻게 감당하고 자신의 삶으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작품해설, 141~142면


이 인용문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랑에 관한 문장 가운데 가장 정확한 문장이 될 것이다. 한 번 더 말하면 사랑은 부조리한 교환이다. 그러나 우리 삶 가운데 부조리한 것이 과연 이것뿐이겠는가. 그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랑은 그보다 더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사랑해 본 사람들만이, 정확히 말하면 부조리하게 사랑해 본 사람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모욕이거나 수치이거나 절망의 모습으로 나타날 그 무게. 당연한 소리지만 그건 한 번 해본 사람들만이 아는 거 아닐까. 그렇게 해서 재훈의 아픈 사랑은, 덜 아픈 삶과 교환될 것이다.



07.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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