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나희덕,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달(2017)
산문시라는 말이 있다. 다들 아시다시피 산문처럼 행과 연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쓰인 시를 일컫는다. 일정한 형식과 규칙을 엄밀히 여기는 정형시와 구분하여 자유시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명칭이 뭐 그리 대수인가. 중요한 건 '시'가 아니라 '시적인 것'에 있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예술 전반에서 장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요즘, 장르는 없고 오직 개인만이 있다고. 그러니까 시를 읽는 것이 아니고 나희덕을 읽는 것이며 발라드를 듣는 것이 아니고 김동률을 듣는 것이라는, 그런 얘기. 최근에는 알앤비도 아니고 힙합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의 음악들이 사랑받는 걸 보며 특히 이 말에 공감했다.
그렇게 해서 시가 산문이 될 수 있다면, 산문이 시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 사실 좋은 문장은 어떻게 써도 알아서 시가 되고 만다. 그녀가 셰익스피어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손목시계를 보며 "시계의 무게보다 그것이 퍼나르고 있는 시간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여겨"진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그 무거운 '시간'을 "삶의 가해자이자 해결자인 그 이름"(63면)이라고 불렀을 때, 그녀의 글은 시가 되었다. 유럽에서 만난 노숙자가 두 마리 개를 곁에 두고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그는 집을 잃고 가족을 잃었는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아직 삶을 버티게 하는 두 가지 무기가 남아 있다. 두 마리 개와 한 권의 책."(28면)이라고 썼을 때도 마찬가지. 좋은 산문은 시에 육박한다는 말이 아니다. 좋은 글 앞에서는 시냐 산문이냐가 무의미해져 버린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타인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자기와 닮은 개를 더 원한다."(30면) 한 번 읽고 나면 쉽게 잊기 힘든 이런 문장들이 나희덕의 세 번째 산문집 속에 넉넉히 들어 있다. 저 멋진 문장을 살짝 비틀어서 이 책에 되돌려주고 싶다. 사람들은 '시'를 필요로 하기보다는 '시적인 것'을 더 원한다. 나 역시 같은 이유로 그녀의 글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문학에도 장르는 없고 오직 개인만이 있으므로, 나는 산문집을 읽은 것이 아니고 나희덕을 읽은 것이다.
07.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