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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Jul 14. 2022

희망은 절망 뒤에.

#66) 임레 케르테스, 『운명』(1975)


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참 많이도 일어난다. 전쟁이나 암살 같은 건 과거에나 가능했던 일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최근에도 벌어졌고 앞으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악하고 세상은 필연적으로 부도덕한가. 이런 생각이 들 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1944년의 아우슈비츠일 것이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는 세상이 비인간적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이 절망적인 세상 앞에 문학은 무얼 할 수 있을까. 문학이 희망을 줄 수도 있을까.

임레 케르테스라는 헝가리의 한 청년이 1년 만에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기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첫 장편 소설인 『운명』은 그 기적적인 생이 낳은 또 다른 기적이 되었다. 그는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글은 무사히 쓰여졌다. 이 두 가지 사실 사이에는 모종의 인과관계가 숨어 있는 것만 같다. 아마 그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썼거나, 쓰기 위해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전자라면 고백하기 위함에, 후자라면 고발하기 위함에 가까울 텐데, 아무리 봐도 이 글은 둘 다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운명』은 왜 쓰였고 무엇을 말하는가.

한 마디로 말해 이 소설은 절망의 기록이다. 절망 위에 또 다른 절망이 쌓여서 원래 있던 절망은 더 깊은 절망이 되고 그 사이로 또 다른 절망이 겹치면서 지독하게, 아득하게, 온 힘을 다해 절망하는 소설이다. 그가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짜이츠 등의 강제 수용소 여러 곳을 전전하며 견뎌낸 시간이 절망이 아니고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그의 문장에는 한이 서려 있다. “어느샌가 그의 주먹이 내 얼굴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나를 때려눕힌 후 장화로 갈빗대를 짓밟았고 손으로 목덜미를 조르면서, 내 얼굴을 다시 시멘트 바닥에 대고 눌렀다. 내게 시멘트를 긁어모으고 핥으라고 했다.”(187면) 그가 수용소에서의 일을 ‘묘사’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술(記述)’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소설이 어떤 자아의 내밀한 고백일 수도, 부정한 세계에 대한 고발일 수도 없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우리의 주인공은 극심한 강도의 강제 노역과 불충분한 영양 공급으로 인해 돌이키기 힘든 신체적 결함을 안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나치들은 일할 능력을 잃은 그를 당연히 죽일 것이고, 가스실이라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이라던가 총살이라던가… 그들이 택할 살해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주인공. 그의 눈에 비친 수용소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오래된 수감자들, 쇠약한 사람들, 완장 찬 사람들, 수용소 파수꾼들, 수용소 내부 부대로 뽑힌 운 좋은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며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 마음속으로 하나의 동경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더 집요하게 마음을 울려대는 그 은밀한 동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아름다운 강제 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동경이었다.

-209면


인용 부분의 저 충격적인 마지막 문장은 과연 나치 강제 수용소에 대한 미화(美化) 인가? 조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우리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132면을 펼치니 주인공이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나는 아우슈비츠에서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조차 지옥은 아니다. 그를 포함해 그곳의 수감되었던 이들은 '적응'했고, 가끔은 '지루해'했다. 심지어는 죽음이라는, 한 인간으로서 요구받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경우에는 그곳마저, 그리고 그곳에서의 끔찍한 생활마저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임레 케르테스의 글은 고백도 아니고 고발도 아니다. ‘위로’다. 그런데 그 위로가 진정한 위로일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절망 덕분이다. 다시 묻자. 문학이 희망을 줄 수도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운명』의 주인공은 지상의 지옥이라고 불리던 나치 강제 수용소를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라 하지 않았나. 과연 인간은 절망적인 세계에서 끝없이 절망하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언제나 희망은 절망 뒤에 온다는 것. 누군가 사력을 다해 절망하지 않고 손쉽게 희망만을 말한다면, 그 희망을 과연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 오직 끝까지 절망해 본 사람만이 믿을 만할 것이다. 지독하고 아득한 절망. 그런 절망의 한복판에 있어본 사람만이 희망을 말할 자격이 있다. 오직 그렇게 말해진 희망만이 유효한 희망일 테니 말이다.

절망적인 세계에서 문학의 역할은 가장 깊게 절망하는 일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오늘날 시인의 책무가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천안함, J 선생님께」, 2010)이라고 썼다. 그의 말대로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자 절망을 가둬 두는 절망의 구조물이어야 할 것이다. 문학은 함부로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희망을 말하려거든 끝없는 절망을 먼저 펼쳐 보여야 한다. 다시 한번 신형철 선생의 말대로,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모국어가 흘리는 눈물」, 2007) 온 힘을 다해 절망하고 난 후에만 겨우 바랄 수 있는 일이야말로 한 줄기의 희망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 『운명』의 마지막 문장은 얼마나 절망적인 끝에 희망적인가.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292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으로 가득하다. 온갖 '끔찍한 일'을 겪고 절망한 한 인간의 인생사. 그는 아직 희망을 말한 바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은 누구라도 희망을 읽었을 것이다. 문학은 희망을 직접 말하는 대신,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그것이 스스로 피어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07.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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