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생활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아직 보급품을 받지 못해 옷을 갈아 입지도, 씻지도 못해 약간은 찝찝했지만 아직은 버틸만했다. 역시 격리를 하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 없었다. 화장실도 생활관 대표 훈련병이 가지고 있는 무전기를 통해 조교에게 보고 후 허락을 받고서 갈 수 있었다. 밥을 먹고 우리는 멍하니 관물대에 기대서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첫날보다는 서로 통성명을 해서 어색한 분위기는 많이 사라졌다. 그렇게 그날도 흘러가고 그다음 날도 그렇게 똑같이 흘러갔다. 4일째 되던 때쯤 우리는 못 씻고 옷도 못 갈아입은 것에 대해 불편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다행히도 활동복을 보급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그날은 씻기도 하고 활동복으로 갈아입고 깔끔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회의 옷을 입을 수 없었다. 택배 박스에 입고 온 옷을 넣고 테이프로 붙이고 집으로 택배를 보냈다.
생활관 동기들과 많이 친해졌지만 생활관에서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니까 너무 심심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훈련병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간부님께서 우리의 심심함을 덜어주고자 보드게임을 하게 해 주셨다. 이런 결정을 보고 나는 정말 운 좋게 좋은 훈련소에 왔다는 생각을 했다. 보드게임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보드게임은 할리갈리, 부루마블, 뱅이 있던 거 같다. 모든 생활관의 1순위 보드게임은 '부루마블'이었다. '부루마블'은 한 생활관 전체 인원이 팀을 짜서 같이 할 수 있었기에 좋은 게임이었다. 보급으로 나온 콜라, 자가비, 오예스를 먹으면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했다. 그러다가 우리 생활관보다 타 생활관이 '부루마블'을 먼저 가져가면 우리는 '할리갈리'를 하거나 서로 떠들면서 나눠주신 인터넷 편지를 서로 나눠보면서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생활관 중에 가장 편지가 많이 온 동현이를 보면서 항상 부러워했다. 개인 정비 시간에 동현이 옆으로 가서 인편을 하나씩 보면서 동현이 친구들도 보고 동현이 입대 전 사진을 보고 생활관 동기들 모두 포토샵으로 보정한 거 아니냐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근데 매일 이렇게 노는 것은 군대가 아니다. 우리는 격리를 하고 있지만 그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생활관에서 할 수 있는 그런 교육 훈련을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첫 교육 훈련으로 '정신전력 교육'을 받았다. 조교가 나눠준 책자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조원들과 나눠보면서 수렴된 의견을 조별로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그것으로 우리의 정신전력 점수를 매기기도 한 것 같다. '정신전력 교육'은 쉽게 말하면 나의 안보관을 확립시키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로 군인과 군대에 대한 질문, 남과 북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사실 나는 이러한 질문들을 좋아하고 즐겨할 자신이 있었다. 정치외교학과를 다닌 나는 이러한 질문들을 많이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근데 질문을 보고 딱히 내 지식을 발휘할 필요는 없었고 한 방울 정도만 떨어뜨렸다. 이것은 당시 군용 수첩에 적은 교육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 중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Q1. 군대와 사회의 일반조직의 차이점은?
A. 군대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반면 사회의 일반조직은 상관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할 필요성이 없다.
군대는 엄격한 체계 아래서 조직이 움직이지만 사회의 일반조직은 유연하게 조직 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Q2. 대한민국과 북한은 현재 어떤 모습으로 변화했는가?
A. 대한민국은 국민들의 헌신으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정착하였으며 지속적인 경제 발전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 되었다.
반면, 북한은 전쟁 직후 사회주의 체제 정착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뤘으나, 이후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에 부딪힘과 동시에 정권 교체가 아닌 세습을 통해 폐쇄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억압적이며 주민들이 자유로운 권리 행사를 하지 못하는 구시대적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Q3. 대한민국이 정통성을 가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적인 이유는?
A.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UN에서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을 포함하여 인권을 보장하고 있으나, 북한은 헌법에 기본적인 인권을 명시하지 않고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Q4. 탈북자들이 말하는 북한의 인권 유린, 사회통제 실상은?
A. WFP(세계식량계획)을 통해 북한에 쌀을 지원하지만, 단체가 직접 감시할 때만 식량을 나눠주고, 감시단이 철수하면 식량을 다시 가져간다.
Q5. 북한은 6.25 전쟁이 미국과 대한민국이 북한을 침략한 전쟁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사실인가?
A. 절대 사실이 아니며 6.25 전쟁은 북한과 소련, 중국의 한반도 사회주의화를 목표로 하고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략한 전쟁이다.
Q6.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 한반도에 설마 전쟁이 일어나겠는가?
A. 냉전 종식 이후에도 북한이 남한에 대한 대남 도발을 여러 번 했으므로 전쟁이 절대 일어나질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북한의 경제 상황과 군사 역량 수준을 고려했을 때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북한 자신이 가장 피해를 많이 받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지 않다. 또한, 북한의 최근 동향을 볼 때 무기는 전쟁용이 아닌 자신들의 우월함과 정상 국가로서의 지위가 충분하는 것을 대외적으로 말하려는 용도이다.
어쩌면 형식적이 대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근데 맞다. 형식적인 대답이다. 정치외교학과를 나오면 좀 다른 답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도록 바란다. 질문 자체가 한쪽으로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원하는 답이 저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과 북한은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물어보면 당연히 우리나라는 잘 발전했고 북한은 경제가 안 좋다고 답해야 하고 아무리 남북이 평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군대에서는 북한은 적일 뿐인 것이다. 정신전력 교육은 군인들의 대북 심리를 형성시키기 위한 교육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재밌게 교육에 임했던 것 같다. 대학 공부를 약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입대 한 지 일주일쯤 되던 때 나를 포함한 훈련병들은 2차 PCR 검사를 실시했다. 야외 연병장 사열대에서 실시했는데 입대 날에 했던 PCR 검사 때보다 코에 더 찔러서 엄청 아팠다. 아마 확실하게 검사하려고 했던 거 같다.
이 맘 때 우리는 군복도 보급을 받고 어떻게 입는지 배우고 직접 입어봤다. 서로 전투화 끈 묶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입었다. 특히 앞 생활관에는 같이 입대한 우진이가 있었고 생활관 동기인 민재의 동반입대 친구가 있어서 생활관끼리 장난도 치면서 엄청 재밌게 지냈는데 서로 군복 핏을 보면서 미군 같다고 장난치면서 떠들었다. 그리고 군복을 입고 나니 진짜 내가 군인이 되었다는 느낌도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