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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enigma
Dec 25. 2024
배추도 포기하면 더 맛있다.
포기(抛棄)와 포기(曝氣), 포기의 아이러니
우리는 이따금씩,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라며, 포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하려던 바를 꺾지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속설이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닌 포기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포기도 맛있을 수 있다.
포기(曝氣)란, 물을 정화할 때하는 예비 조작이다. 물을 공기와 최대한 접촉시켜, 물속 유기물을 분해하고 순도를 높이는 과정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포기하지 말라 하지만, 가끔은 포기를 통해 정화되고, 재정비하여, 더 순도 높은 한 발짝을 내딛기도 한다.
때때로, 포기(抛棄)야말로 포기(曝氣)가 되는 셈이다.
포기가 단순히 실패의 동의어는 아닌 것이다.
오징어게임의 징검다리 편에서, '참가자의 앞 번호부터 게임을 진행한다'는 힌트가 나온다. 그리고 남은 건 처음과 끝, 1번과 16번.
이정재가 1번을 선택하자, 망설이던 참가자가 말했다.
"제가 평생 뒤에 숨어서 남 눈치만 보고 살았어요. 태어나서 딱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는 이정재에게 번호를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이정재가 번호를 바꾸어주며 1번과 16번의 운명이 바뀌었다. 바로, 이 번호가 죽음의 순서였다.
결국 이정재는 마지막 순서가 되어 생존했고, 1번 참가자는 용기를 내어,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맞았다.
이정재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선택을 포기했다. 그러며, 죽음의 위기가 기회로 반전되었다.
1번 참가자는 두려움을 포기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되려, 마무리를 맞았다.
결국 이정재의 포기(抛棄)는 포기(曝氣)였고,
1번 참가자의 포기(曝氣)는 포기(抛棄)가 된 셈이다.
하지만, 1번 참가자는 평생 족쇄처럼 자신을 옥죄던 망설임과 눈치에서 해방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다. 부정적인 방향의 포기(抛棄)만은 아니었다.
이정재도 1번 참가자도, 결국 포기를 통해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룬 것이다. 포기를 통해.
포기는 선택이고, 선택은 포기이기도 하다.
결국, 포기란 단순한 후퇴가 아니다.
포기(抛棄)가 정화를 위한 포기(曝氣)로 이어질 때, 우리는 더 맑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누군가의 끈기가 다른 무엇의 포기이기도 하다. 반대로 누군가의 포기는 시작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하지만, 그 미덕도 방향을 잘못 잡으면 삶을 옥죄는 굴레가 될 뿐이다. 자신의 선택이 스스로를 온전하게 유지하는지 자신을 흐리게 하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꽉찬 것이 포기일 수도, 포기가 아닐 수도 있고
공백이 포기일 수도, 포기가 아닐 수도 있다.
포기와 포기하지 않음은
동시에
공존한다.
나의 포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실은 포기가 아닐 수도 있음을, 나의 포기하지 않음이 사실 포기일 수도 있음을 가늠해야할 것이다.
포기(抛棄)가 포기(曝氣)가 되어야 할 것이다.
포기란, 가능성을 정화하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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