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버스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랫말 한 소절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내 어깨 위로 짊어진 삶이 너무 무거워 지쳤다는 말조차 하기 힘들 때…”
마흔 중반의 어느 퇴근길,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나는 울컥했다. 마치 누군가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에 일어나 어두운 밤이 되어 돌아오는 하루하루,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조직 안의 경쟁은 쉼이 없었다. 직장에서는 책임이, 집에서는 ‘가장’이라는 이름이 어깨를 눌렀다. 무게를 재어본 적은 없었지만, 분명 그때의 나는 ‘삶은 무겁다’라는 감각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 노랫말은 위로였고, 동시에 공감이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이 작은 안도처럼 다가왔다.
그로부터 스무 해 남짓 흐른 지금, 나는 어느새 예순 중반에 접어들었다. 사회적 경쟁의 최전선에서 물러났지만, 삶의 무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어깨가 단단해진 것인지, 아니면 짐을 내려놓는 법을 배운 것인지, 예전처럼 짓누르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지켜야 할 것’보다 ‘지켜본다는 것’이 더 많아진 시기가 되었다.
그 노랫말을 읊조리다 보니 자연스레 마흔의 내가 떠오르고, 동시에 어느새 마흔을 앞두고 있는 아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책임의 상당 부분이 이제 그의 어깨로 옮겨갔을 것이다. 그 역시 삶의 무게를 버거워하며 하루를 견디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마음이 쓰인다. 해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다만 뒤에서 묵묵히 응원할 뿐이다. 언젠가 그도 지금의 나처럼 이 시절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일 날이 오기를 바란다.
요즘 동갑인 아내와 나는 자주 같은 말을 한다.
“지금이 참 좋다.”
누군가 젊었을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다시 밤늦게까지 일하며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고 싶지 않고, 아이의 앞날을 걱정하며 잠을 설쳤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체력은 줄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고, 욕심은 줄었지만 만족은 오히려 커졌다. 가벼운 산책, 따뜻한 커피 한 잔, 저녁 무렵의 노을만으로도 하루는 충분히 채워진다.
다만 이렇게 좋은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젊었을 때는 시간이 더디 가는 듯해 답답했는데, 지금은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넘어가는 속도가 체감상 몇 배는 빨라졌다.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현재에 대한 애착이 커졌다는 뜻일까.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 존재가 있다. 이제 막 두 돌을 지난 손주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말이 늘고, 표정이 풍부해진다. 세상을 처음 만나는 눈빛 속의 호기심, 어제 못 하던 일을 오늘 해내는 작은 성취들, 새로 만들어내는 단어와 문장들…. 나를 보면 온몸으로 환호하며 반기고, 잠시도 쉬지 않고 조잘대는 그 반가움 속에서 나는 시간을 붙잡아 두는 또 다른 방식을 배운다. 손주의 하루는 빠르게 흘러가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여유를 배운다.
마흔의 나는 삶을 ‘짊어지고’ 살았다. 예순의 나는 삶을 ‘바라보며’ 산다. 무게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무게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붙잡을 것은 사랑과 감사처럼 가벼운 것들로 바뀌었다. 그래서 어깨는 한결 편안하다.
언젠가 또 다른 노랫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때는 어떤 공감이, 어떤 위로가 찾아올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아내와 함께 “지금이 좋다”라고 말할 수 있고, 손주의 성장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따듯하다. 그 무게 또한, 이제는 감당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