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입성
오전 8시 40분에 탑승한 파리행 AF267 편의 좌석이 예상 밖으로 여유가 있어 이코노미 석을 비즈니스 석처럼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행운이 이번 여행의 좋은 징조이길 바랐다. 우리 시간으로 오후 9시 20분(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 20분)에 드골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고 보니 우리처럼 큰 배낭을 멘 한국인이 여럿 보였다. 비행기를 함께 타고 온 사람들이었다.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각자 흩어졌고, 우리는 미리 예약한 몽파르나스 역 인근 숙소로 가기 위해 '르 뷔스 디렉트'를 타러 갔다.
공항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공항 안에서 마주쳤던 이 중 한 사람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전직 교사 출신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나 테제베 파업 소식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는 시내로 향하는 내내 질문을 쏟아냈고, 나는 답변을 하면서도 준비가 부족해 보이는 그의 여정이 걱정스러웠다.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바로 몽파르나스 역으로 갔고, 아내와 나는 예약해 둔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가는 길은 왕복 2차선 도로의 양쪽에 다양한 상점이 줄지어 있고, 간혹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는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차도보다 인도가 더 넓어 보인다는 점과 차도를 지나다니는 차량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줄지어 있는 상점을 보니 활기찬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건강한 세포 또는 실핏줄을 보는 듯했다. 10여분 걸어 숙소에 도착해 잠시 쉬다 보니 방금 전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진 사람이 생각났다. 짧은 만남이었음에도 오랜 친구와 작별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운 좋게 테제베를 타고 바욘으로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바욘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순례길 출발점인 생장피에드포르에 도착할 수 있다.
다행이다 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도 몽파르나스 역으로 가봤지만, 우리가 예약한 열차는 이틀 뒤에야 출발이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역은 파업으로 인해 북적였고, 상담을 받기까지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어설픈 영어로 어렵사리 정보를 얻었지만, 전직 교사의 행운은 내게 오지 않았다. 아내를 숙소에 남겨두고 혼자 다녀오던 길, 내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된 아내가 나를 찾아 나선 모양이었다. 서로 엇갈려 헤매다 길에서 마주쳤을 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낯선 파리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오직 아내뿐이었다. 아내가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바욘으로 떠나는 열차를 탈 수 있었던 전직 교사를 보면서 여행을 할 때 숙소나 교통편을 미리 다 정할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렇지만 다음 여행에서도 나는 어김없이 숙소나 교통편을 미리 정한다는데 500원을 걸 수 있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앱을 통해 예약한 한인 게스트하우스였다. 유학 왔다가 정착한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몽파르나스 역과 가까운 데다 숙박비도 저렴했고, 아침 식사로 간단한 한식을 제공했다. 우리는 이 게스트하우스에 단 하나뿐인 화장실 딸린 독실을 선택해 소박한 사치를 누렸다. 주인 부부와 대화를 나눠보니 자녀 교육과 취업을 걱정하는 모습이 우리 부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그곳에 머물고 있는 시기에 투숙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었는데 대부분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선 것으로 보였다. 특히 친구 사이인 40대 후반의 대구 여성 세 명은 며칠 뒤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도착한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알베르게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여행은 예기치 않은 만남과 재회의 연속이다.
순례길 일정을 줄이게 되면서 파리에서 이틀을 더 머물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정 변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특별한 시간을 선물 받았다. 이전 세 번의 파리 방문에서는 단체여행으로 에펠탑, 개선문, 몽마르트르 언덕 같은 명소들을 빠르게 훑는 데 그쳤다면,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파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이 되자, 미리 예약해 둔 몽파르나스 타워 전망대에 올라갔다. 어둠이 내려앉는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여행 첫날을 마무리했다. 209미터 높이의 59층 건물인 몽파르나스 타워는 파리에서 가장 높은 오피스 빌딩으로,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다. 특히 야경을 감상하기에 적합해, 에펠탑보다 낫다는 평가도 있다. 고요하게 반짝이는 파리의 불빛 아래서 우리는 이번 여정의 시작을 천천히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