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계획은 있어도 실패한 여행은 없다.

by 백승인

아들 부부와 함께한 이번 제주 여행은 조금 특별했다. 우리 부부는 3박 4일, 아들 부부는 5박 6일의 일정으로 머물렀다. 사흘은 함께하고, 넷째 날 이후에는 각자의 여정을 이어가는, 말 그대로 ‘따로 또 같이’ 여행이었다.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방식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을 듯하다.

함께한 3일은 따뜻하고도 분주했다. 손주와 물놀이를 즐기고,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해변과 음식점을 돌며 웃고 떠들었다. 아침이면 손주가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와 우리 방 이불속에 파고들었고, 밤이면 그 아이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웃음이 터졌다. 손주와 함께 있는 공간은 어디든 밝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듯했지만, 함께할 수 있는 날은 금세 지나갔다.


사흘째 오후, 공항 근처에서 팥빙수를 나눠 먹고 아들 부부와 헤어졌다. 그들은 제주의 동남쪽으로 향했고, 우리는 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애월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손주의 종종걸음을 보는 기쁨은 없었지만, 제주의 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고 구름은 느리게 흘렀다. 늦은 오후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카페에 들러 시간을 보낸 후,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나선 해안도로를 타고 가면서 경치를 즐기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이어졌다.


첫 목적지는 넓은 통창 너머로 바다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감성 카페였다. 판포포구 인근,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던 곳이다. 먼 길을 돌아 유턴까지 해서 찾아갔지만 주차장은 텅 비었고, 계단을 내려가 보니 철문이 굳게 닫혔다. 간판은 그대로였으나, 휴무일이 아니라 한참 전에 문을 닫은 듯했다.

두 번째 목적지는 협재 해수욕장 근처의 양식당이었다. 황게 파스타와 돌문어 스테이크를 기대했지만, 하필 정기휴무일이었다.


차선책으로 찾은 곳은 한담해변 산책길 근처의 한식당이었다. 이름난 맛집이라 빈자리가 없었고,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린 뒤에야 자리를 잡았다. 2인 세트 메뉴는 솥밥 2 종류와 전복물회, 전복버터구이, 고등어구이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전복 솥밥은 익숙했지만 갈치 솥밥은 처음이었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 위에 갈치구이가 올려져 있고, 양념장을 더해 비비니 고소하고 깊은 맛이 났다. 무엇보다 잔가시까지 말끔히 발라내 살점만 남긴 정성이 인상적이었다. 전복 물회와 전복 버터구이도 입맛을 돋웠다. 좋은 음식은 말보다 먼저 마음을 움직인다.

식사 후 애월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이어갔다. 휴가철답게 도로는 다소 붐볐지만, 바람은 시원했고 적당한 포만감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미리 눈여겨봤던 또 다른 카페도 문이 닫혀 있었지만, 굳이 이름난 곳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길가에서 눈에 띈 한적한 카페에 들어서니 넓고 조용한 실내, 높은 천장과 큰 창이 시야를 시원하게 열어주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엄마들과 서너 살쯤 된 아이들이 들어와 시끌벅적해졌지만, 전날까지 손주와 함께 지냈던 우리 부부에게 그 소음은 오히려 음악처럼 들렸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바다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바다와 하늘은 경계를 잃고 하나로 이어졌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청량했다. 그 풍경을 보며 문득 엉뚱한 상상이 스쳤다. 만약 세상에 바다가 없고, 온통 육지만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흘러갈 곳 없이 고여 있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바다는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쉼표를 찍어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제주에 삼다(三多)가 있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바다'와 오름이 제주 그 자체다.


이날의 일정은 계획과 전혀 달랐다. 가려던 카페는 문을 닫았고, 먹고 싶던 음식도 맛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모든 어긋남이 오히려 여유와 웃음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이런 일탈이야말로 여행의 진짜 얼굴일 것이다. 일정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자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실패한 계획은 있어도, 실패한 여행은 없어요.”

생각해 보니 제주에 올 때마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은 내 몫이었고, 아내는 어느 곳을 가든 무엇을 먹든 개의치 않았다. 제주를 제대로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쩌면 나보다 아내일지도 모른다.

제주에서 보낸 하루하루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함께 있어 행복했고, 따로 있어도 편안했다. 아들 부부와 헤어진 뒤 웃음 가득한 손주를 떠올리며 아내와 단둘이 지내는 시간도 좋았다. 예상 밖의 갈치 솥밥은 깊은 위로가 되었다.

여행은 목적지가 아니라, 함께한 사람과 나눈 대화로 기억된다. 카페가 문을 닫아도, 식당이 쉬는 날이어도 괜찮다. 그런 소소한 일탈들이 결국 우리의 시간을 구성하고, 그 시간이 곧 삶을 이룬다. 오늘도 그렇게, 실패한 듯 성공적인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듯 인생은 여행과 다르지 않다.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 더 많지만, 그 안에 뜻밖의 기쁨이 숨어 있다. 중요한 건, 그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냈는가이다. 나는 아내,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주와 함께 있다.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언젠가 어린 손주가 자라 자신의 아이와 함께 다시 제주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때 오늘 우리가 웃으며 남긴 이 한 조각의 기억이 그 아이의 시간 속에서 조용히 깨어날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