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여름휴가를 제주에서 보내자며 가족여행을 제안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시부모와 함께하는 여행을 반길 며느리는 없는데.” 하면서도 좋아했다. 아들보다 며느리에게 더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나는 오랜만에 낡은 앨범 깊숙한 곳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빛바랜 색감과 사라진 윤기 속에, 앳된 얼굴의 우리 부부와 어린 아들이 있다. 우리는 박제 사슴들 사이에서 활짝 웃고, 아들은 내 무릎에 기대어 새끼 사슴을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다. 정방폭포 앞에서 바닷물에 발을 담근 사진, 송악산을 배경 삼아 나란히 선 사진, 마라도 최남단 표지석 앞에 앉은 모습까지—모두가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 후 처음 맞은 여름방학, 우리가 함께 떠난 첫 제주 여행의 흔적들이다.
그 여행은 손위 동서 가족과 함께한 패키지여행이었다. 승합차를 타고 제주 곳곳을 돌며, 관광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고,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숙소에 들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모든 순간이 새롭고 귀했다. 하지만 이후 한동안은 제주의 땅을 밟지 못했다. 그러다 아들이 군에 입대한 것을 계기로 다시 제주를 찾기 시작했고, 지난 10년 동안은 매년 한두 번씩 제주를 방문하게 되었다. 특히 두 차례의 한달살이를 통해 제주의 이곳저곳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계절이 바뀌고 마음이 달라질 때마다, 제주는 또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아들도 결혼 전 한동안 우도에서 머물 정도로 제주에 매료된 듯하다. 다만 성인이 된 아들과 우리가 함께 제주를 찾은 적은 없다.
여행의 목적지가 제주라는 점도 반가웠지만, 여섯 달 만에 손주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는 사실에 더욱 설렜다. 아들이 항공편과 렌터카를 예약했고, 운전대를 잡았다. 늘 내가 운전하며 아내와 함께하던 여행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들 부부가 여행의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쥐게 되었다. 아들은 조수석에 앉은 며느리와 식당이나 관광지를 상의하며 계획을 이끌었고, 아내와 나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애초부터 마음을 먹고 떠난 여행이었다. ‘입은 닫고, 지갑은 열자.’
숙소는 아들이 다니는 직장의 수련원으로 예약되어 있었고, 조용하고 깔끔한 분위기 덕분에 어린 손주와 함께 지내기에 더없이 적합했다. 아침이면 손주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방문을 벌컥 연다. 우리는 아직 이불속에 누워 있지만, 녀석은 거리낌 없이 올라와 몸을 비빈다. “아지!”, “아니!” 하며 터뜨리는 웃음은 그 어떤 음악보다 달콤한 세레나데처럼 들린다. 그렇게 우리 셋은 한 이불 위에서 뒹굴며 웃고, 따뜻한 숨결이 엉킨 아침을 맞는다. 그 시간만큼은 여행 중 가장 평화롭고 사랑스럽다. 그 순간 내 얼굴을 사진으로 남긴다면, 눈과 입은 물론이고 귀와 코까지 웃고 있으리라.
아내는 손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경외의 눈길로 바라본다. 아들에게서 나왔지만 또 다른 존재인 이 작은 생명이 어찌나 신비롭고 경이로운지, 마치 외계에서 뚝 떨어진 것 같다고 한다. 손주에게 푹 빠진 아내는 이동할 때면 자연스럽게 아이 옆에 앉아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넨다. 손주는 아직 말을 완전히 떼지 않았지만, 눈빛과 표정, 몸짓과 감정으로 세상을 읽고 표현한다. 우리말 듣기 평가를 치르면 100점도 거뜬히 받을 만큼 말귀도 잘 알아듣는다.
해변에 도착하자, 아이는 작고 통통한 손으로 모래를 움켜쥐었다가 흩뿌리며 웃는다. 작은 발로 모래를 박차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며 우리 부부를 번갈아 바라보며 손짓을 한다. 숲길을 걷다가도 흥이 나면 내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뒤뚱뒤뚱 혼자 앞으로 나아가다 돌아서서 “아지!” 하고 부른다. 아직 ‘할아버지’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아 그렇게 부르지만, 그 짧고 또렷한 한마디에 마음이 녹아내린다. 장난감 하나 손에 쥐어주진 못했지만, 제주의 하늘과 바다를 마음 가득 담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30여 년 전, 우리 부부는 아들과 함께 제주의 풍경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이번에는 아들 부부가 아이, 그리고 부모와 함께 제주의 감동을 나눴다. 차량 이동 중 운전석 너머로 얼핏 드러난 아들의 등은 책임감과 여유를 동시에 짊어진 든든함 그 자체였다. 초등학생이던 아들이 자라서 운전대를 잡고, 옆자리의 며느리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손주는 그의 등을 보며 자란다. 언젠가 손주도 어른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 자식, 부모와 함께 제주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은 바람처럼 흐르고, 우리는 그 안에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사람들은 여행을 일상에서의 탈출이라 하지만, 내게 여행은 삶의 연속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한 이들과의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이다. 세대가 바뀌고, 계절이 달라질 뿐. 그 삶의 연속 위에 우리는 추억이라는 깃발을 하나씩 꽂는다. 그리고 언젠가 손주가 그 깃발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여기, 우리 가족이 다녀갔었구나.” 그렇게 웃으며 말해줄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제주는 그 자리에 머문다. 변하는 건 우리 발자국뿐이다. 나는 희망한다. 훗날 손주가 그 발자국을 따라 걷고, 우리와의 시간을 마음속 깊이 떠올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