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감당해야 할 '값'은

by 백승인

유시민은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였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헌법상의 권리는, 사실 서구 선진국들이 수백 년에 걸쳐 싸우고 쟁취한 결과물이다. 여성 참정권만 보아도 그렇다. 근대 여성 참정권은 1883년 뉴질랜드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민주주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는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의 희생 끝에 1928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인정받았다. 프랑스의 경우 1848년 2월 혁명 이후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지만,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백 년 뒤인 1944년이었다.


우리나라도 1948년 헌법 제정 이후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등 수많은 국민이 피와 땀을 흘리며 민주주의를 지켜왔지만, 그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말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서일까, 헌법이 선언하는 많은 가치들이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부터 그렇다.


‘민주공화국’이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를 말한다. 유시민은 이를 "호모 사피엔스 문명사에서 일어난 제도 진화의 최고봉"이라 평가하며 묻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정말 국민에게 있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권력은 과연 국민으로부터 비롯된 정당한 권력인가?”

그는 헌법을 처음 읽은 지 3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질문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2013년 개봉한 영화 『변호인』은 이러한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당시 1,1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극장을 찾았는데, 배우 송강호는 법정 장면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외쳤다. 이 대사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70~80년대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2016년, 경향신문은 창간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라는 주제로 7회에 걸친 기획 기사를 실었다. 불평등, 노동 탄압, 특권 세습, 권력 독점, 법치 실종, 부정부패, 대의제의 한계 등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위기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짚어냈다. 이 역시 “우리는 정말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되새기게 한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 사람들이 많았고,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유시민의 주장처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후불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 그 값을 치러야 한다는 데 깊이 공감한다. 다만 그 대가가 부당한 죽음이나 억울한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남겨진 이들의 끝없는 눈물, 절망, 슬픔이 민주주의의 대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값’은 보다 성숙한 참여와 연대, 정의를 향한 끊임없는 물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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