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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적 작가 시점 May 11. 2022

경찰은 기자와 공범이었다.

김 형사, 가서 피의자 좀 꺼내와~ 부터 취재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경찰과 기자는 인권 침해의 공범(?)이었다. 적어도 피의자 관련 보도에서 만큼은. 지금은 사라진 관행이 되었지만...


경찰서 신출내기 형사반장으로 근무하던 2000년.

옆 반에서 강도 혐의로 피의자를 구속했는데, 기자가 취재 요청을 해왔다. 보도자료를 배포한 모양이었다.


언론 대응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지켜보았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반장은 "김 형사, 가서 피의자 좀 꺼내와~"한다.


잠시 후 사무실 입구에 카메라가 설치되고, 유치장에서부터 피의자를 수갑 채워 데려오는데 TV 뉴스에서 보듯이 드라마틱하게 아니, 나쁜 놈처럼 보이게 잠바를 뒤집어 씌워서는 데리고 왔다.

오피스텔 감금 살인 피의자 (2021. 6. 21. NEWS1 자료 화면)

그걸 일일이 카메라가 찍고 있었고. 아... TV에서 보던 검거되어 오는 그 장면이 사실은 저렇게 찍는 거였구나 싶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범인 얼굴도 다 공개해 줬으면 속이 시원하겠고, 국민의 알 권리나, 재발 방지 측면에서 공개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으나, 피의자의 인권 또한 보호되어야 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 후, 조사하는 척하는(?) 형사 앞에 머리를 푹 숙이고 잠바를 뒤집어쓴 피의자를 앉혀 놓고는 카메라를 드론처럼 자유자재로 이동한다. 옆에서, 아래에서, 뒤에서도 찍고, 간이 사다리 위에 올라가서도 찍고.(이걸 카메라 스케치라고 했다.)


담당 형사가 컴퓨터 모니터 화면의 죄명을 마우스로 긁어서 블록 잡아주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고의 어깨 손상 비보이 병역비리 사건 자료 화면(2010. 9. 9. YTN 보도화면 캡처)

인터뷰 또한 그럴싸하다. 피의자의 책상 앞에 각 언론사의 마이크를 쭉 올려놓고는 "선생님, 강도는 혼자 하신 거예요?", "그 돈은 어디에 쓰신 거예요?", "그 전에도 강도하신 적 있나요?", "피해자에게 한 말씀해주세요." 등등 방송에 나갈 최적의 멘트를 얻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다.


피의자의 답변이 원하는 대로 안 나오거나 말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형사의 신문에 준해서(?) 다시 좀 큰 소리로 말씀해 주세요, 빨리 답변하셔야 끝나요, 얼른 한 마디만 하고 끝내시죠 등등 기자들의 독촉 멘트가 쏟아졌다.

2008. 9. 9. 연합뉴스 자료 화면(이러한 형태로 촬영을 하고, 취재를 하였다.)

피의자의 답변에 따라 쭉 둘러 있던 기자들은 키득키득 대기도 하였고, 심각하게(?) 인터뷰하고 있는 피의자와는 달리 오랜만에 만난 기자들과 형사들 서로 안부도 묻고 잡담을 하기도 했다.

촬영 과정 내내 피의자도 죄인임을 알기에 그런 것인지 그러한 취재 행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TV에서 그러한 모습을 쭉 봐 왔기 때문에 원래 검거되면 다 방송에 나오는가 보다 했을 수도 있다.


취재가 마무리되고, 형사들도 기자들도 서로 훈훈하게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사들을 나누고는 썰물 빠지듯 그렇게 기자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그때서야 피의자를 덮고 있던 잠바를 벗겨 주면서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하고는 커피를 한 잔 타주며 형사들과 같이 담배도 피우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는 중국집에서 사식도 시켜 같이 먹었다.


그렇게 초임 때부터 다양한 사건에 대한 경험뿐만 아니라, 언론 대응 경험도 하게 되었다.


그 후, 크고 작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사건에 대해 보도자료를 작성했고, 직접 인터뷰도 하면서 수차례 언론에 조명이 되었다.

허위 입원 보험사기 교사 검거 사건(2012. 9. 13. MBN) / 슈퍼카 불법 대여 사건(2012. 11.30. YTN)
몰카 이용 사기 도박 사건(2013. 6. 29. 연합뉴스) / 중금속 물수건 유통사건(2012. 5. 31. SBS)
보험사기 관련 인터뷰(2012. 4. 25. SBS Biz) / 센트럴시티 살인 피의자 황주연 사건 서울신문 인터뷰(검거사건 뿐만 아니라 미검사건에 대한 인터뷰도 하였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323017003


그 과정에서 기자들이 피의자 인터뷰 요청을 하면 나 또한 배운 대로(?) 피의자를 촬영할 수 있게 배려를 해 주곤 했었다.

기자들에 따르면, 검거사건 보도의 완벽성을 기하기 위하여는 피의자 인터뷰를 포함한 스케치, 담당 경찰 인터뷰가 들어가야 하고, 전문적 정보가 가미된 사건의 경우 전문가의 인터뷰까지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피의자의 인터뷰를 꼭 넣고 싶어 했다.


항변을 좀 하자면, 나를 비롯한 우리 수사팀은 항상 문제점을 인식했었기에 고참들이 했던 것처럼 피의자의 의사에 반해서 무조건 카메라 앞에 앉혀 놓지는 않았다.


"선생님, 언론에서 취재하러 오는데요. 옷을 덮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안 나갑니다. 기자들이 질문하면 답변 해 주시면 됩니다."라고 설득을 했었고, 대부분의 피의자들은 죄를 반성하는 차원에서인지 다 이해를 했고, 동의 하에 취재 협조를 했다.

그중에는 극구 취재 협조를 안 하겠다고 하여 스케치나 인터뷰를 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실제로 중요범인을 검거하여 사무실에 들어갈 때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언론사들과 시간 조율을 하여 촬영 준비가 되어 있는 현관을 통과해 들어가기도 하였다.


*** 2010. 2. 일본, 타이완에서 7억대 귀금속을 강취하여 한국으로 도주하여 도피행각을 벌이던 피의자를 검거하였는데, 취재 시간을 조율한 사건이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2/0000287791

YTN 방송화면 캡처(화면 가장 왼쪽에서 피의자를 검거해 오는 수사팀원들을 맞이하는 저자)

그러한 관행을 나를 비롯한 내가 몸 담은 수사팀만큼은 2013년을 끝으로 더 이상 하지 않았고, 기자들도 나에게 그런 무리한 요청은 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2019년 법무부 장관 사태를 계기로 경찰 또한 경찰수사 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을 통해 원칙적으로 수사사건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했고, 그로 인해 사건 관련 언론에 보도자료를 제공하는 일은 사라졌다.


물론 예외적으로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거나,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로 사건 관계자의 권익이 침해되었거나, 신속한 범인 검거 등을 위해서는 공개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제5조)



이 자리를 빌려 그동안 본의 아니게 취재에 협조를 했던 피의자 분들께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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